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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3 01:26 483회 0건
시간이 갈수록 지루해진 지아는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여가수의 목소리마저 짜증이 났다. 오디오 전원 스위치를 눌러 꺼버렸다. 관리인 최 광섭이 퇴근하고 가정부마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집안은 다시 적막 속에 갇혔다. 소파에 앉은 지아는 어두워지는 창문 밖을 내다보며 턱을 괴고 있었다.

높은 밤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들이 반딧불처럼 떠돌았다.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승용차의 불빛이 철문 앞에 와서 멈추었다. 정원을 내다보던 지아의 눈빛이 반짝였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진우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반가운 마음에 불쑥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려다가 망설였다. 왠지 쑥스러움에 현관 문 옆에 기대섰다.

정원을 지나친 진우는 현관문을 열고 들어섰다. 무심코 뒤돌아선 그는 바라보는 지아의 눈빛을 의식했다. 앞가슴이 트인 원피스를 걸친 그녀의 새침한 표정! 집안에는 그들을 주시하는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시선이 마주친 그녀에게 그가 다가섰다. 그리고 그녀의 어깨를 슬며시 당겨 가벼운 키스를 했다.

“오늘, 뭐했어?”
“몰라! 전화 오는데도 없고........”
“전화, 기다린 모양이네!”
“.........”

대답도 하지 않은 지아가 돌아섰다. 진우가 다시 그녀를 붙잡아 돌려세웠다. 그리고 다시 키스를 했다. 뽀로퉁한 표정이었던 그녀는 그의 입술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의 입속으로 혀가 빨려들어가고 오히려 그녀는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혀와 혀가 엉키는 키스를 하고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심심하면 친구라도 만나지. 내일부터 자주 전화할게......!”
“.........”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그녀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떠올랐다. 지아나 진우의 일상생활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었다. 비록 은밀한 기다림이지만 그들에게는 생활의 기쁨이고 전부였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그들은 거실에 같이 앉아 커피를 마셨다. TV를 보면서 대화를 하는 그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을 느꼈다.

권 회장이 없는 일주일은 그들에게 천국이었다. 하지만 진우에게는 목표를 잃어버린 시간이기도 했다. 그들은 점점 하루라도 떨어질수 없는 감정으로 서로에게 집착하였다. 거의 매일 드라이브 하거나 영화 관람, 쇼핑도 하며 식사를 같이 했다. 외출하지 못하는 날은 가정부와 관리인의 시선을 피해 지아의 침실이나 진우의 방에서 뜨겁고 은밀한 관계를 이어갔다.

그들만의 생활은 권 회장이 귀국하고 존재할 수 없었다. 진우는 다시 지아의 남편인 권 회장의 충실한 심복이 되었고 그녀는 다시 자신만의 울타리에 갇혔다. 하지만 그녀는 의지할수 있는 진우가 곁에 있기에 행복했고, 한편으로는 그의 여자로만 존재하고 싶었기에 남편이 더욱 두려웠다. 세상에는 특별히 정조가 굳거나 음란한 여자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여자는 어디까지나 여자이고 아름다운 사랑을 갈구하기에 탈선하는 것이다.

권 회장은 골프 여행을 하는동안 부진한 사업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느라 고심했다. 해가 갈수록 국내 물가는 상승하고 소비도 줄고 있었다. 모든 사업체가 국내시장 물품 공급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국외시장을 확보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특히 유통부분은 유가상승과 운송물량이 감소하고 있어 포기하고 다른 사업체의 이윤증대에 투자해야할 상황이었다.

국내외로 대부분의 제품생산 기업들은 소비성향이 많은 국외로 수출증대 사업에 역점을 두고 있고 해외건설에 투자하고 있었다. 권 회장은 그룹의 전체적인 경영을 위해서는 해외개발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현재 해외개발 실장은 신 하진 이사의 동생 신 호균이 담당하고 있었다. 물론 형인 신 이사를 신임하기 때문에 맡긴 것이었다.

권 회장은 신 호균 실장의 능력으로는 해외개발 사업을 확대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다. 사업추진력이 없는 신 실장은 책상을 지키는 샐러리맨에 불과했다. 그러나 마땅한 적임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권 회장은 문득 외국어에 능통한 서 진우를 떠올렸다. 명문대를 졸업한 그는 두뇌도 명석하고 체력도 믿음직스러웠다.

권 회장은 진우와 정을 통했던 도희를 떠올렸다. 분통이 터졌으나 의식도 없는 형이 사망하면 그녀와 인연도 끝이기에 참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남자다운 패기가 넘치고 일을 추진하는 능력이 있었다. 그리고 권 회장 자신의 사적인 문제를 털어 놓을수 있는 심복이었다. 문득 언젠가 오피스를 구입해서 나가겠다는 그를 만류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여행을 하는동안 고심했던 권 회장은 밀렸던 일정을 마무리하고 간부회의를 소집했다. 어찌보면 신년도 사업을 대비한 회의였기에 인사이동까지 예측하는 간부들은 긴장된 모습으로 회의장에 모였다. 건 회장으로서느 회장에 취임한 후에 처음으로 개최하는 임원과 운영진이 합석한 간부회의였다. 하지만 별도의 안건이나 순서도 없는 권 회장 주관의 회의였다.

“오늘 모인 임원과 간부들에게 그동안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오늘은 엄마남지 않은 한해를 마무리해야하고 새롭게 사업에 대한 의논을 하고자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주제는 단 하나, 지금까지의 사업상황과 우리 신화의 미래를 위한 개인 의견들을 허심탄회하게 토론하면 좋겠습니다.”

권 회장의 인사말이 끝나자, 모두들 눈치를 살폈다. 재정 담당 임원으로서 의류 생산업체 사장인 정 동주 이사는 미간을 찌푸리고 묵묵히 앉아 있었다. 그 외에도 정 이사를 지지하는 간부들은 별로 관심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신 하진 이사가 서류가 담긴 바인더를 들고 일어섰다.

신 이사는 권 회장으로부터 간부회의를 소집한다는 말을 이미 귀뜸으로 들었던 것이었다. 연단 탁자 앞에 나선 그는 신화 그룹 산하의 기업들에 대한 경영실적을 자세하게 발표했다. 그리고 은연중에 권 회장이 말하고자하는 의견에 대해 피력했다.

“......지금 국내 시장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입니다. 소비시장의 감소 뿐만 아니라, 인건비 상승으로 생산비와 유통비용이 생산원가의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해외시장을 넓히는 경영 혁신을 하지 않고는 비대해지는 구조를 지탱해 나갈수도 없고 신회의 미래를 개척할 수가 없다고 판단되며.........”

장황한 신 이사의 발언에 이어 눈치를 살피던 경영진들이 하나둘씩 연단에 올라갔다. 대부분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부서의 상업성과를 과대포장하는 설명이었다. 한 시간 가량 회의가 진행되고 잠시 휴식시간을 이용해서 자리를 비웠다. 진우는 틈을 이용해 비상계단으로 나갔다. 그리고 지아에게 전화를 했다.

“지아~! 뭐해?”
“그냥 있어요. 오빠! 오늘...... 시간 없어?”

“응! 지금 회의중이야. 일찍 못들어 갈거 같은데.”
“왜......!? 어디가?”

“그런건 아니고, 회의가 언제 끝날지 모르지만, 저녁식사라도 하면 늦을 거 같아서.”
“그럼......! 어떡하지?”

“뭘......!?”
“그냥.......!?”

“회의 끝나고 전화 할게.”

통화를 끝낸 진우는 쓸쓸하게 혼자 있을 지아가 걱정스러웠다. 그가 회의장으로 들어가니 이미 다른 간부들 대부분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다만 정 동주 이사만이 보이지 않았다. 다시 회의가 진행되었지만 발언을 하는 간부들이 없었다. 주위를 둘러본 권 회장이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의 의견을 잘 들었습니다. 하여튼 한해를 마무리하고 신년 사업을 위한 회의를 갖겠지만 생산비용을 절감할 수 없는 회사는 과감하게 처분하고 전망성 있는 사업을 개발하거나 투자증대를 해야겠습니다. 특히 대도개발은 인수할 기업을 물색하거나 페쇄할 생각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모두 알다시피 해외개발에 역점을 두고 산하기업와 연결시켜 신화의 재탄성을 마련하는 국내 제일 기업으로 탈바꿈 시켜야겠습니다. 다른 의견이 있는 분은 말하세요.”
“.........”

권 회장의 말에 다른 의견을 발언하는 사람은 없었다. 회장이 산하 기업 경영에 대한 방침을 어떤 방향으로 정할지 기대하기에 참석자들은 침묵으로 서로의 눈치만을 살폈다. 또한 인사이동이 있다는 것은 뻔한 이치였다. 눈치를 살피던 참석자들이 귓속말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위를 들러보던 권 회장이 회의 종료를 대신한 인삿말을 햇다.

“그럼, 모두들 한해의 사업 마무리들을 잘해주시기 부탁하고, 혹시나 부족한 사업이 있으면 계획했던 목표이상 달성해주기 바랍니다. 그리고 신화발전에 도움되는 의견이 있으면 언제라도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자리에서 일어선 권 회장이 회의장을 나가고, 뒤쫓아서 참석자들은 우르르 회의장을 빠져 나갔다. 몇몇 간부들은 회장실을 찾아가서 권 회장에게 눈도장을 찍고 나갔다. 인사이동을 열려하는 약삭빠른 간부들이었다. 비서실을 통해 회장실을 드나드는 사람들이 뜸할 즈음에 권 회장이 진우를 호출했다.

지아의 일상생활을 걱정할만큼 애정이 깊어진 진우는 권 회장에게 더욱 적개심을 느꼈다. 한편으로는 그의 여자를 빼앗았다는 통쾌함도 들었다. 소파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던 권 회장이 그에게 앉으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정면을 응시하다가 넌지시 물었다.

“오피스를 구입해서 나가고 싶다고 했나! 지금도 그런 생각인가?”
“제 생각은 그렇지만~! 저는 회장님 지시대로........!”

“그래! 따로 나가면 뭐하나! 먹고, 치우고, 관리하고, 생활비만 들고 힘들지. 요즘같은 시대에는 절약을 해야 돼. 당분간 그냥 있어.”
“네.......!”

권 종호 회장 저택으로 옮기라는 지시를 받았던 순간, 진우는 자신의 주거지를 옮기고 싶었었다. 그러나 지아의 곁을 지키고 싶은 상황으로 변했기에 그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담배연기를 뿜어낸 권 회장이 이어서 말했다.

“내가 말이야........”
“........!?”

“자네를 기획개발 실장으로 발령낼 생각이야.”
“네......!?”

진우로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권 회장의 말이었다. 그가 비서실장으로 발령받은지 몇 달도 지나지 않은 상황이었다. 또한 진우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권 회장을 가까이 할수 있는 비서실이 편했다. 그러나 권 회징의 말에 의의를 제기할 명분이 없었다. 단지 조금더 자유로눈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뿐이었다.

“제가 경험도 없이, 어떻게........”
“경험이 별거인가. 자네같으면 금방 업무 파악할테고, 외국어에도 능통하잖아. 그리고 내 지시대로만 하면 돼.”

“........!?”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내 일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이야. 같이 생활도 하니까......”

“.........”
“앞으로 기획개발실에서는 해외 개발 사업 계획과 계열 회사의 업무도 관장해서 자네가 걔속 신경써야 되.......”

진우는 권 회장의 말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권 회장의 인사명령은 바로 오후에 그룹내에 전달되었다. 해외개발부와 기획실이 기획개발실로 통폐합되었고 해외개발실장이던 신 호균이 상무 이사로 서 진우가 기획개발실장으로 보직 발령받았다. 그에 따른 하부부서 변동과 보직발령이 있었다. 회장의 자가용 운전기사로는 총무과 직원으로 보조역활을 하던 김 인환 기사가 전담하게 되었다.

인사발령을 끝낸 권 회장은 잠시 또 다른 생각에 잠겼다. 직책들을 변경하다 보니 비서실장 자리가 공석이 된 상태였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는 출장중인 한 재식 총무과장을 떠올렸다. 어쪄면 그가 가장 신임해야할 직원이었다. 동시에 그는 유 은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관심을 두지 말아야할 직원의 아내였다. 하지만 은연중에 그가 사심을 품고 있는 여자였다.

심사숙고하던 그는 비서실 직원을 불럿다. 한 재식을 비서실장에 그리고 유 은영을 총무과장에 임명하는 인사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유 은영을 호출했다. 그녀는 습관처럼 회장이 지시를 할 일이 있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녀가 언제나 변함없는 다소곳하고 정숙한 모습으로 그의 방으로 들어왔다. 스파에 앉았던 권 회장이 손짓을 했다.

“앉아. 오늘은 해줄말이 있어서 불렀어.”
“네. 회장님! 무슨일로........”

소파에 반듯하게 앉은 은영은 스스럼없이 권 회장의 지시를 기다렸다. 그녀는 무심코 마주한 권 회장의 시선을 의식했다. 그녀는 말아올라간 스커트 자락을 무릎 밑으로 끌어내렸다. 그리고 블라우스 앞 가슴을 여몄다. 순간 권 회장의 눈빛이 반짝였다.

“내가 한 과장을 비서실장으로 임명했어.”
“네.......!? 제 남편을 요?”

“응! 그리고 유 계장이 총무과장을 맡아주었으면 좋겠어.‘
“제가 총무과장.......!?”

“왜.......!?”
“아, 아뇨! 너무 과분해서요.”

은영은 짐작도 못한 인사라서 황당하기도 햇다. 물론 회장이 그녀 부부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지만 파격적인 인사명령이었다. 근무년수가 오래된 직원들이 많았다. 하지만 권 회장이 근무년수에 관계없이 직원 인사발령을 한다는 것은 직원 누구나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이지만 감격스러웠다.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권 회장의 눈빛이었다.

“내가 그랬잖아. 남편의 출세는 아내에게 달렸다고. 유 은영은 충분해.”
“감, 감사합니다.”

“부럽기도 하고......! 유 대리를 생각할때마다 난 외로운 생각이 들어.”
“네!? 무슨 말씀.......”

“내가 독신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잖아.”
“.........”

“이따금 유 대리가 내 마음도 위로해줘......”
“.........”

“세상은 겉으로 들어나는 것보다 깊은 인연들이 많아.”
“.........”

은영은 문득 권 회장이 자신의 마음속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았다. 아니 그의 앞에 벌거벗겨진 상태로 있는 기분이었다. 사실 권 회장은 마음속으로 그녀의 옷을 하나씩 벗겨내고 있었다. 주아리고 앉은 그녀의 무릎 사이로 하복부가 들어나 보이는 것만 같았다. 그는 상상만으로도 저절로 흥분이 되었다.

“그럼, 바쁜데 가 봐. 잘 부탁하고.”
“아뇨! 제가 부탁드리고 감사합니다.”

“그래, 그럼 언제 집으로 초대해 줄거지. 정겨운 가정을 보고 싶고, 아내가 마련해주는 식사를 하고 싶은 심정인데, 대신 유 과장이 그렇게 해 줄수 있지.”
“네......!? 아 네. 그럴게요.”

은영은 마치 꿈만 꾸는 것만 같았다. 남편과 결혼하고 경제적이나 사회적 지위나 바라던 희망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다복한 가정을 이루려는 부풀었던 꿈이었다. 회장의 말이 끝나기도전에 그녀는 자신이 무슨 대답을 하는지도 모르고 일어섰다. 회장실을 나오는 그녀는 단지 남편에게 소식을 전달하고 싶을뿐이었다.

본사 사옥 건물 일층의 로비에 직원들이 모여 있었다. 게시판을 올려다 보는 직원들이 웅성거렸다. 회장이 사업경영 역점을 강조한 기획개발실 통폐합과 보직 임명 발령이었다. 무엇보다도 큰 변수는 권 태호 전임회장의 자가용 운전기사였던 서 진우가 일년도 되지 않아서 비서실장을 거쳐 기획개발 실장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또한 입사된지 얼마되지않은 직원들의 파격적인 인사이동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점심 식사를 하려는 직원들이 쏟어져 나왔다. 그들 틈에 섞인 진우가 걸어나왔다. 게시판 앞에 모여 있던 직원들이 지나쳐 가는 그에게 굽신거리며 인사를 했다. 표정 변화없이 무뚜뚝하게 입구를 향해 걸어가는 그는 권 회장이 몇몇 임원들과 식사를 하러 나가는 모습을 확인하고 혼자 나온 것이었다.

진우는 동행하자는 권 회장에게 개인적인 볼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지아와 약속한 음식점으로 가는 중이었다. 건물 밖으로 나와 걸어가는 그는 주위를 살피며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오 덕재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연결이 되자않아 두 번씩이나 다이얼을 눌렀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잠시 멈추어 섰던 진우는 오 덕재와 미리 정해놓은 암호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손짓해서 불러 세웠다. 서울역 근처에서 내린 그는 부지런히 걸어서 맛집으로 소문난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다. 미리와서 앉아 있던 지아가 그에게 손짓을 했다. 그는 다가오는 종업원을 보고 그녀에게 말했다.

“뭐! 주문하지. 지아가 먹고 싶은거.”
“그냥, 오빠가 해줘!”

메뉴판을 들여다본 진우가 훈제 연어 셀러드와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그를 쳐다보는 지아가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는 사랑스러운 그녀를 그윽한 눈빛을 보냈다. 그때 그의 휴대폰 벨이 울렸다. 오 덕재에게 걸려온 전화를 획인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지아게게 말했다.

“잠간만.......!”
“........!?”

진우는 휴대폰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화장실로 향하는 복도로 향했다. 굽한 용무가 아니면 오 실장이 이 시간에 전화할 리가 없었다. 통화버튼을 누른 그가 먼저 말했다.

“오 실장! 어디지?”
“저, 지금 사무실에 들어왔습니다. 급히 전화 드려야 할거 같아서요.”

“왜......!? 무슨 일 있어?”
“대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아! 그 일 때문에 전화 했었는데, 뭐라고 그래?”
“대도를 인수받을 생각 없느냐고요. 저희뿐만 아니라 다른 운수회사도 연락받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사장님 지시가 없었기에, 그럴 생각 없다고 했더니. 용역사업까지 포함해서 넘기고 은행융자도 알선해 주겠다고 하더군요.”

“대도 인수할 회사없어! 융자는 게네들이 손실금을 보충할 자금이고.”
“그럼 다시 연락와도 거절할가요?”

“아니 인수할거야.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은행 융자해준다는 금액만큼 다운되면 지시할게.”
“네! 그런데, 그러다가 다른 회사가 인수하면 어떻게 합니까?”

“인수할 회사 없다니까.”
“네! 알았습니다.”

통화를 끝낸 진우는 다시 홀을 향해 걸어갔다. 신화가 대도개발을 페업하지 않고 다른 회사에 넘길 계획이라는 것을 진우는 짐작하고 있었다. 신화에서는 대도의 손실을 인수최사에게 부담시키려는 것이었다.
진우는 새한화물만으로도 목적달성을 한것이고 만약 대도개발의 운송업이나 용역사업을 인수해도 폐업신고를 할 생각이었다. 오히려 신화 그룹 전체 신용도에 타격을 입힐 계획이었다.

진우가 지아에게 돌아가니 이미 주문한 음식이 식탁에 놓여 있었다. 의아스러운 표정을 지은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주앉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전화야? 바쁜가 봐.”
“아니, 급히 연락할 곳이 있어서! 맛있겠다. 배고프지?”

의도적으로 여유있는 표정을 지어보인 진우는 나이프와 호크를 들고 스테이크를 잘랐다. 그리고 자상한 눈빛으로 지아 앞의 접시에 스테이크 조각을 올려주었다. 그녀가 호크로 스테이크 조각을 집어 입에 넣고 씹으며 미소를 지었다.

“맛있다~! 그런데, 오늘 회의가 오래 걸렸나 봐......? ”
“아~! 조금.......”

“중요한 회의였어요?”
“음.......! 나를 기획개발실장으로 발령했던데......”

“기획개발.....!? 뭐하는 곳인데?”
“그냥. 이것저것.......! 쉽지는 않지.”

“그럼, 오빠! 차 운전 안하면 따로 나가서 사는거야?”

음식을 먹던 지아는 포크를 들고 진우를 빤히 쳐다봤다. 그녀는 남편 권 회장 회사 업무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남편이나 그녀를 입양했던 권 태호가 일려주지도 않았고 그녀도 관심이 없었다. 다만 얼마되지 않는 기간에 급성장했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그녀는 단지 그가 곁에서 떠나는 것이 두려울뿐이었다. 진우가 빙긋이 웃었다.

“왜!? 내가, 나갔으면 좋겠어?”
“피 잇~!”

입술을 삐죽 내밀어 보인 지아가 하얗게 눈을 흘겼다. 그리고 의도적으로 관심이 없는 표정으로 그녀는 포크로 스테이크를 찍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의 대답이 궁금했다. 그가 안심하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냥 있어 달라고 하던데. 나도 굳이 독립할 필요가 있나 생각도 들고.......”
“........”

지아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녀는 남편과 관련된 얘기를 꺼려하고 있었다. 특히 그와 대화중에는 더욱 남편의 이름을 입밖에도 내지 않으려했다. 진우도 마찬가지로 회사 업무와 연관된 얘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업무에 관한 사항들은 대부분 권 회장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진우와 지아는 말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그들만의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즐겁고 행복했다. 그들이 서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기다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기다려지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서로를 기다리는 것은 영혼의 열망이었다. 그들은 서로를 기다리면서 사랑을 키우는 것이었다.

지아는 진우와 같이 있는 하루하루가 새로운 삶의 연속이었다. 여성이 한 남성을 사랑할 때, 여성은 그 남성에게 모든 것을 지배 당하고 싶어한다. 사랑하고 있을 때가 여자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소유이며 여성에게 있어서는 인생의 역사이다. 가로수가 앙상한 가지를 들어내도 그들에게는 따뜻한 봄이었다.

첫 눈이 내리고 있었다.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진우는 지아를 떠 올리고 전화를 했다. 그녀와 자연스럽게 만난 그는 시외로 승용차를 몰고 나갔다. 눈송이가 떨어지는 숲과 산을 바라보며 무작정 드라이브를 하던 그들은 남이섬 숲길을 거닐며 밀어를 나누었다. 캐롤송이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이브에는 흥청거리는 인파속에 묻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년말 년시가 되면서 진우는 사업 점검과 새로운 업무계획에 적응하느라고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나 저녁늦게 귀가하는 날도 식구들의 시선을 피해 지아와 눈빛을 교환하고 잠이 들었다. 권 회장 또한 각종 모임에 참석하느라고 밤이 늦게 귀가해서 아침 일찍 출근하거나 아예 외박을 하는 날도 있었다.

새해가 되고 신정 연휴라고 하지만, 진우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더욱이나 모처럼 연휴를 맞이하여 권 회장이 낮에도 불쑥 불쑥 집을 드나들어 눈치가 보였다. 지아가 지루하고 답답한지 그의 방을 찾기도 했다. 한달이 지나서 신화의 전반적인 신년업무계획에 대한 준비가 정비되었다.

구정을 맞이하여 거리는 고향을 찾거나 관광을 떠나는 사람들과 차량으로 북적거렸다. 신화그룹 전체가 휴무상태인지라 권 회장은 낮에는 집안에만 있다가 밤늦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모두들 즐거운 표정으로 식구들과 연휴를 보내지만 권 회장이 있는 집안은 오히려 냉기가 흘렀다. 진우는 지아와 대화할 시간은 물론 눈빛을 교환하기도 쉽지 않았다.

연휴가 지나가고 권 회장은 비서실장 한 재식과 일본에 출장 일정이 잡혀있었다. 권 회장은 이미 한 실장을 심복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권 회장의 일본 출장은 구상하고 있던 IT사업의 활성화를 위해 일본 반도체 기업 NEC과 제휴 계약을 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기업간의 제휴를 위한 출장이지만 답답한 일상에서 벗어나 며칠 쉬려는 목적도 있었다. 막상 집을 비워야하는 그는 아내를 떠올렸다.

권 회장은 몇 개월째 아내와 대화가 중단된 상태였다. 이따금 마주쳐도 타인처럼 생각했다. 그는 아내라는 존재조차 잊어버리고 싶었다. 아니 당장이라도 이혼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룹의 총수가 가정문제로 언론에 오르내린다는 것은 개인뿐만아니라, 그룹전체의 사업과 명예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었다. 그에게 아내는 호적상의 명칭뿐이고 유령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래도 아내에게 출장을 간다는 사실만은 알려야 할 것만 같았다.

출장 전날 권 회장은 기업인들과 저녁식사를 마친후 술좌석을 피해 귀가했다. 일찍 집에 들어왔다고 하지만 벽시계의 시침이 밤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욕실에서 나온 그는 이층으로 올라갔다. 서재 맞은편 방에서 스며나오는 불빛에 그는 서 진우가 퇴근했다는 것을 의식하고 멈칫거렸다.

그는 사실 일본 출장에 총무과장이 아니라, 담당 부서인 기획개발 실장과 동행하려고 했다. 하지만 회사를 비우는 동안 믿을 사람이 탐탁지 않았다. 물론 신 하진 이사도 있었지만, 가족이나 다름없는 서 진우만큼 신뢰할 수가 없었다. 서재로 들어간 그는 NEC와 제휴 계약에 필요한 서류들을 검토했다.

한동안 회사 업무에 관한 상황을 떠올리던 귄 회장은 소등하고 서재를 나왔다. 어두운 이층 층계를 내려간 그는 거실을 지나며 길게 하품을 했다. 자신의 방문 앞에 다가선 그는 망설였다. 아내에게 출장을 알려준다는 생각을 다시 떠올린 것이었다. 탐닥치 않지만 그는 돌아서서 아내의 침실이 있는 맞은편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어두운 복도 중간에 그림자가 우뚝 서있었다. 츄리닝 차림의 서 진우였다. 별다른 생각없이 걸음을 옮기려던 권 회장은 멈칫했다. 그리고 급히 주방으로 향하는 벽뒤로 몸을 숨겼다. 벽쪽에서 진우와 마주보고 있는 또 하나의 그림자! 그의 아내 모습이었다. 진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안 잤어!?”
“낮에 잠을 잤더니.......”

“하루 종일.......!?”
“자다깨다 했더니, 머리만 아프고......”

“회장님! 내일, 일본 출장 가는거 알아?”
“..........!?”

대답없이 진우를 올려다보는 지아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리고 진우가 팔을 뻗었다. 어둠속에서 그들을 바라보던 권 회장은 소리없이 숨을 들이마셨다. 믿기지 않는 광경에 권 회장은 예리한 눈빛으로 주시했다. 진우의 손이 어디로 향해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손을 잡은 것인가. 아니면 벽을 짚은 것인가. 아내의 어깨를 잡은 지도 모른다. 권 회장은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렸다.

실루엣처럼 들어나는 그들의 그림자! 저것들이......!? 그들의 야룻한 눈위기에 권 회장은 낀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치 아내의 불륜현장을 목격하는 심정이었다. 어둠속의 그들이 어떤 자세로 있는지 알수는 없었다. 그들의 모습을 자세히 보려고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엿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들어날 것 같아서 권 회장은 조바심이 났다.

두 그림자의 실루엣이 한 동안 정지되어 있었다. 그리고 진우의 그림자가 권 회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급히 숨을 멈춘 그는 급히 계단 밑의 어둠속으로 몸을 숨겼다. 계단을 오르는 진우의 발자국 소리! 이어서 아내의 방문 여닫히는 소리! 그리고 집안은 어둠과 적막 속에 갇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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