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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3 01:26 459회 0건
진우는 지금까지 과정이 수포로 돌아가고, 계획에 차질이 생길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권 회장에게 쌓았던 신임을 잃을뿐만아니라, 자칫하면 신화에서 쫓겨 날지도 모른다. 혹시 권 회장이 비자금 명세에 대해서도 자신에게 추궁한다면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 것이다. 물론 그에 대한 대처를 준비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국면을 맞이할 것이다.
권 회장의 목소리가 실내에 메아리쳤다.

“말해 봐! 네 아버지가 제공한 각서에는 왜, 동의를 안 한 거고. 왜 그랬어? 이 집안에 며느리 자격을 포기한 거야! 그렇다면 당장 형님과 이혼하고 사라져. 그러고 마음대로 살면 되잖아. 네가 먼저 꼬리 쳤지?”
“아녜요.........!”

“아니라니....!? 뻔뻔한 년! 변명하고 싶어?”
“난, 어쩔 수 없었어요. 저 사람이 갑자기! 그리고 협박에 어쩔 수 없어서.........”
“........!?”

대답 없이 침묵을 지키던 도희의 입에서 튀어 나온 말에 진우는 당황했다. 그는 그녀를 이용하고 있었어도, 애정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여자의 눈물을 보고 믿지를 말라고 했지만 진우는 그녀가 돌변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그가 없으면 못살 것 같다고 말하던 그녀였다.

잠시나마 그녀에게 닥친 상황을 걱정했단, 그는 분노를 느꼈다. 여자는 급격히 돌변하는 무서운 성품을 지니고 있어 남자를 두렵게 한다고 한다. 남성은 남성 나름의 의지가 있고, 여성은 여성 나름의 삶의 방식이 있다고 하지만 진우는 그녀의 배신에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진우와 도희를 번갈아 쳐다보는 권 회장이 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창가로 가서 뒷짐을 지고 섰다. 창밖을 내다보는 그는 그들에 대해 고심했던 생각들을 다시 정리했다. 이용가치가 있는 그들을 당장 어떻게 처리할 방법은 없었다. 돌아선 그의 목소리가 실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김 기사 있나~?”
“.......”

“김 기사~!”
“.......네!”

회의실 문이 열리고 김 기사가 들어섰다. 그는 복도에서 권 회장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부리나케 들어선 그가 권 회장 앞으로 다가서서 허리를 굽실거렸다. 권 회장이 낮은 목소리이지만 도희와 진우도 들을 수 있도록 힘을 주어 말했다.

“앞으로 김 기사가 형님을 모셔. 그리고 내 지시 없이 누구도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해.”
“네......! 네. 알았습니다.”

크게 한숨을 내쉰 권 회장은 뚜벅거리는 발걸음으로 회의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고 실내는 무거운 침묵에 빠졌다. 김 기사가 도희에게 다가가 집으로 모시겠다고 말했다. 입구로 향해 가던 그녀가 진우 옆을 지나치다가 주춤거리며 ‘미안 해!’라고 작은 목소리를 흘렸다. 그녀가 나가고 나서도 진우는 한동안 머물다가 회의실을 나왔다.

진우는 다음날부터 김 기사와 임무를 교대하고 권 회장의 저택에서 머물게 되었다. 그는 권 회장의 자가용 운전기사로 신화그룹에 남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악몽의 실타래를 풀려는 꿈이 난관에 부딪칠 줄 알았던 그에게는 도리어 권 종호를 밀착하여 동태를 살필 수 있는 행운이기도 했다. 그의 시선을 먼저 사로잡는 것은 권 회장 아내 지아의 놀라는 눈동자였다.

지아는 남편의 지시로 김 기사와 업무를 교대한 진우가 집에 있게 됐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내 미이라처럼 생동감이 없는 그녀의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진우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그녀가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그는 그녀를 마주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승용차로 권 회장을 출퇴근시키고 항시 대기해야하기 때문이었다.

그에 대한 권 회장의 신뢰감은 예전 같지 않았다. 권 회장이 자가용을 이용하지 않을 경우에 진우는 혼자 귀가하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수시로 호출을 당하기에 모든 것이 자유롭지 못했다. 그는 이따금 외박을 하는 권 회장에게 여자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퇴근길이었다. 술에 취한 권 회장이 내연관계를 갖고 있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넌지시 밝혔다.

“언젠가 자네는 알게 될 것 같아서 말하는데, 난, 내 처가 싫어. 자유스런 생활이 편해서 늦게까지 결혼 안했던 건데....... 이제와서 후회해도 소용이 없지만.........”
“..........”

“사실은 내가 살림을 차려준 여자가 있어.”
“..........”

“차 세워! 내가 운전할 테니. 자네는 지하철역에 내려줄게”
“..........”

어둠이 내려앉은 밤에 빗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권 회장이 외박을 하려고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진우는 갓길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에 올라탔다. 빠르게 움직이는 원도우 브러시에 차창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이 튕겨나갔다. 권 회장이 기어를 풀고 가속페달을 밟으니 승용차가 속력을 높여 나갔다.

진우는 핸들을 잡고 있는 권 회장을 살폈다. 이무리 봐도 술에 취한 그의 운전이 불안해보였다. 빗속을 질주하는 차량들이 옆으로 질주하고 권 회장이 잡고 있는 핸들이 좌우로 흔들렸다. 깜박거리는 신호등이 교차로였다. 그때 쾅~!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 앞 범퍼에 부딪는 소리가 들렸다.

“엇~!”

“음........!”

“끼~ 익~ !”

급히 브레이크를 밟는 소리! 교차로를 건너다가 놀라서 멈추어선 사람들! 멈추어선 승용차 헤드라이트 불빛에 쓰러져 있는 검은 물체가 드러나 보였다. 승용차 앞 유리창에 머리를 들이받은 진우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핸들에 머리를 부딪친 권회장의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검은 물체를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의 웅성거림! 진우는 급히 조수석에서 뛰어내렸다.

꼼짝도 하지 않는 검은 물체는 승용차에 부딪친 아주머니였다. 어디선가 경찰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승용차 운전석으로 다가갔다. 운전석에 웅크리고 있던 권 회장이 잔득 겁에 질린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순간 진우는 그가 측은해 보였다. 당당하던 그의 모습이 아니고 공포에 질린 남자에 불과했다.

“내려요~!”

진우는 와락 소리를 지르고는 권 회장의 멱살을 잡아 운전석에서 끌어 내렸다. 그리고 뒷좌석에 그를 밀어 넣었다. 권 회장을 대신해서 운전석에 올라앉은 그는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손으로 문질렀다. 뒤에 멈추어선 경찰차의 붉은 비상등이 위급상황을 알리듯이 모여드는 사람들을 비추며 돌아갔다. 경찰차에서 내린 경찰이 야간 봉을 흔들면서 혼잡해지는 도로의 교통정리를 했다. 경찰 한 명이 운전석으로 다가왔다.

“많이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면허증 주시겠습니까?”
“.........”

진우는 말없이 운전 면허증을 꺼내 경찰에게 건네주었다. 비상경고등을 밝힌 구급차가 도착했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아주머니를 실고 사라졌다. 뒷좌석을 돌아보는 진우의 시선에 잔득 웅크리고 있는 권 회장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평소 거칠고 과격한 권 회장이 의외로 겁이 많다는 것을 느꼈다.

경찰서로 가서 조서를 받는 동안에도 권 회장은 꾸부리고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진우는 목격자 조서가 끝난 권 회장을 택시에 태워 보냈다. 그리고 아침까지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조서를 받았다. 다행히도 병원응급실에 실려 간 피해자는 큰 부상이 없고 골절상을 당했다고 했다.

불의의 교통사고는 권 회장이 피해자 가족에게 합의금을 전달하고 경찰을 매수해서 종료되었다. 그리고 권 회장은 시고당시의 초라했던 모습과 달리 그룹 소유주로서 당당함을 과시했다. 다만 진우는 다시 자신을 신임하는 그를 느낄 수 있었다. 교통사고가 잊혀갈 무렵 권 회장이 퇴근길 승용차 안에서 그의 눈치를 살피면서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수고했네. 그런데 자네에게만 말하는데, 골치 아픈 일이 생겼어.”
“..........”

“누군가 내 뒤를 쫓는 거 같아. 아니면 그년에게 다른 남자가 있던지.......”
“...........”

“소문이 날 테니, 경찰에 연락할 수도 없고.....! 대도 애들을 시키기도 체면이 아니고.......! 자네가 알아봐 준수 없나?”
“네.......!?”

“처음에는 도독인줄 알았는데, 잠든 시간에 두 번이나 누가 들어왔다가 튀어 나가더라고. 그리고 집 앞에서 연희가 습격을 받은 적도 있다는 거야. 그런데 이상하게 물건이나 사람을 노린 것 같지는 않고 그때마다 트럼프 한 장씩을 놔두고 간 거야.”
“트럼프라고요.....!?”

“응! 스페이드 에이스.”

진우는 괴이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트럼프 카드 중에 스페이드는 죽음을 암시하고 특히 에이스는 죽음과 불행의 예고였다. 누군가 귄 회장이나 그의 내연녀에 대해서 알고 있고 원한을 품은 자의 소행이었다. 권 회장이 어두운 표정으로 진우를 향해 몸을 숙이면서 진지한 말투로 말했다.

“자네가.......! 소문 안 나게 알아봐 주게.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하고.”
“네......!”

진우는 권 회장의 사적인 요구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는 모르지만 어쨌든 악몽에 대한 모든 열쇠를 쥐고 있는 그에게 한발 더 다가갈 수 있는 기회였다. 그는 권 회장의 주변 인물부터 관찰하기 시작했다. 시기적으로 볼 때 회장 취임식 전후에 일어난 일이였다. 우선 그의 회장 부임을 반대했던 임원이나 직원들을 떠올렸으나 너무 광범위하고 무언가 목적이 있었다면 권 회장이 위험을 느낄 수 있도록 시간을 끌지 않았을 것이다.

진우는 권 회장에게 앙심을 품은 도희나 그를 저주하는 지아를 떠올렸다. 하지만 도희는 아버지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하지만 목숨을 노릴 만큼 독한 성격이 되지 못했다. 또한 그가 판단하는 지아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기는 하지만 어려서 입양되어 세상 물정을 모르고 곱게 자라서 벌레도 잡지 못할 순순한 성격이었다. 그는 유독 권 회장이 여자 집에 갔을 경우에만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착안점을 두었다.

진우는 우선 오 덕재에게 전화를 걸어 권 회장의 내연녀 송 연희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며칠 후 저녁에 진우는 권 회장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말했다. 물론 그가 확인해달라고 부탁했던 일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청담동에 있는 룸살롱 황제를 찾아갔다. 그곳은 권 회장의 내연녀 송 연희가 운영하는 술집이었다.

진우는 계산대에서 장부를 들여다보고 있는 여인이 권 회장의 내연녀 송 연희라는 것을 직감했다. 30대로 보이는 그녀는 뛰어난 미모와 육감적인 몸매로 남자들의 호기심을 이끌만한 여자였다. 나비넥타이의 젊은 청년이 구십도 각도로 허리를 굽히며 그를 맞이했다. 스무 살이 갓 넘어 보이는 웨이터였다.

“어서 오십시오! 혼자 오셨습니까?”
“.........!”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웨이터가 복도 중앙에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잠시 후 물수건과 물주전자, 컵 등을 쟁반에 받쳐 들고 들어온 웨이터가 깍듯이 인사를 하고 물었다.

“혹시 찾는 아가씨 계십니까?”
“아니! 여기서 고참이고 인기 많은 아가씨 있으면......”

“아! 네. 그럼 희정 누나가 좋겠네요. 예쁘고 착한 누나입니다.”
“........!”

“술은 뭘로 하실래요.”
“패스포트 있나?”

“네. 드릴가요?”
“음~!”

방안은 마치 왕궁에 들어온 것처럼 넓고 호화스러웠다. 웨이터가 나가고 조금 있으려니 짧은 스커트에 민소매 블라우스를 걸친 여자가 술과 안주를 들고 들어왔다. 탁자에 술과 안주를 내려놓은 그녀가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

“이 희정에요. 잘 부탁 드려요.”
“...........”

“어머! 멋있는 분이시네요. 한잔 따라 드릴게요.”

소파에 앉은 진우 옆에 다가앉은 그녀가 술병을 집어 들었다. 그는 그녀가 위스키를 따라서 건네주는 잔을 받았다. 그도 그녀 앞에 잔을 놓고 위스키를 따라 주었다. 그라스에 얼음을 채우는 그녀가 그를 힐끔 쳐다봤다.

“여기 처음이신가 봐요. 노래 한곡 하실래요?”

“노래 잘 하나....!?”
“잘은 못해도 직업이니까요.”

“난, 그냥 조용히 얘기나 하면 좋겠는데.”
“무슨 얘기요?”

“이런 생활 오래했나?”

진우의 물음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웃었다. 그리고 그의 팔에 매달리면서 한쪽 허벅지위에 다리를 올려놓았다. 허여멀건 한 허벅지가 드러나 보였다. 그리고 술잔을 들어 내밀었다.

“우선 한잔 하실래요!”
“.........!”

그녀가 진우가 집어 드는 술잔에 부딪고 미소를 흘렸다. 그는 반잔 정도 술을 마시고 내려놓았지만 그녀는 단숨에 비운 잔을 탁자에 내려놓았다. 그는 다시 잔을 채워주자 그녀의 속눈썹이 꿈틀거렸다.

“저 대전서 올라왔거든요. 그냥 농사꾼 딸이었어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은 가고 싶은데 가난한 형편이라서 무조건 서울로 올라왔어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야간대학에 들어갔으나 쉽지 않더라고요. 할 수 없이 이 생활을 시작했는데, 대학을 졸업하고도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제가 이 생활 시작한지도.......”
“미스 리는 손님마다 자신의 얘기를 하나?”

그녀의 얘기 중간에 진우가 불쑥 물었다. 너무 흔한 스토리 같았고 그가 들어온 목적과 다른 그녀의 넋두리였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희죽 웃었다.

“그렇지 않아요. 손님 따라 다르고, 제가 얘기하고 싶을 때만.......왜요! 듣기 싫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한 두 손님을 상대하지 않을 테니까. 미스 리, 꿈이 뭐야?”

“음......! 이런데 일하다보면 대게 자신의 가게를 갖는 거겠지요. 우리 송 마담처럼 요. 하지만 저는 해변에 작은 음식점을 갖고 싶어요. 매일 바다를 분수 있잖아요.”
“송 마담도 미스 리 같은 생활을 했나?”

“네. 언니는 사실 남자를 잘 만나서 그래요. 이건 비밀인데요. 신화그룹 권 회장 세컨드거든요.”
“아! 그렇군.”“이런 얘기 다른 사람한테 하지 마세요.”

“그런데 왜 나한테.......!?”
“그냥 사장님한테는 왠지 말해도 괜찮을 거 같아서........”

“..........!”

빙긋이 웃음을 흘린 진우는 반쯤 남은 위스키를 바시고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도 잔을 베우고 그의 잔을 채워 주었다. 진우도 그녀의 잔에 술을 따라주며 말했다.

“미스 리는 남자 없어?”
“없다면 거짓말이죠. 그렇지만 그냥 단골손님예요. 여기서 일하려면 단골 없인 힘들어요.”

“마담도 손님을 받나?”
“아뇨! 특별한 손님이 오면 룸에 들어와서 인사만 하고 나가요. 예전에 사귀던 애인은 있었어요. 동거까지 했던 차 인석이라는 남자. 요즘도 가끔 오지만 언니가 무시하고 처다도 안 봐요.”

“남자가 마담을 좋아하는 모양이지?”
“결혼까지 생각했을 정도로 서로 좋아했어요. 한마디로 언니가 배신한 거지요. 하기야 청계천에서 작은 공구상점을 하는 남자가 도움 되겠어요. 어떤 날은 언니에게 술주정하다가 경찰서에 끌려가기도 했어요. 여기 와서 언니 집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는데 누가 가르쳐 주겠어요!?”

“음.......! 지금도 그 남자가 마담에게 집착하는 모양이지.”
“네. 그런 거 같아요. 아직 결혼도 안하고 혼자 산다는데........”

진우는 현재까지 상황으로 볼 때 권 회장이 말했던 인물이 송 마담과 깊은 관계였던 남자라는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남자는 언제나 최초의 애인이 되고 싶어 하지만, 여자는 빈틈없는 본능으로 남자의 마지막 애인이 되는 것이라고 했다. 술기운이 돌기 시작한 미스 리는 자신의 지나온 삶에 대한 푸념을 했다.

진우는 더 이상 그녀에게 다른 정보를 알아 날수 없었기에 지루한 시간이었다. 그는 횡설수설하는 그녀의 배웅을 받으며 룸을 나왔다. 황제 살롱을 나오던 그는 얼핏 몸을 숨겼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가 낯설지 않았다. 권 회장의 비서실장 고 순철이었다. 진우는 요즘 와서 수시로 눈에 뜨이는 고 실장이 왠지 석연치 않았다.

입구로 들어선 고 실장이 지나가는 웨이터를 붙들고 무엇인가 물었다. 그리고 웨이터의 안내를 받아 구석진 방으로 들어갔다. 진우는 권 회장을 수행하느라고 고 실장이 송 마담의 룸살롱을 알게 되었는지도 모른다고 무심하게 생각했다. 입구로 나가려던 그는 진우는 다시 생각하고 고 실장이 향하고 있는 룸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열려진 문틈으로 룸 안이 들여다보였다. 룸 안에는 이미 손님이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허름한 점퍼 차림의 남자였다. 짧게 깍은 머리에 눈동자가 유난히 커 보이는 남자가 일어나서 고 실장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웨이터가 나오면서 문이 닫히고 진우는 복도를 되돌아 나왔다. 고 실장이 만나는 남자의 신원에 대해 궁금증을 가진 그는 어쩔 수 없이 황제 살롱을 나왔다. 진우는 알아낸 정보가 있을 때마다 권 회장에게 보고했다.

진우는 오 덕재를 통해서 송 마담의 전 애인이었던 차 인석에 대한 정보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휴대폰으로 전송된 사진을 보고 의아심을 가졌다. 룸살롱에서 고 실장을 기다렸던 남자와 동일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권 회장이 고 실장에게도 같은 지시를 내렸고 그래서 고 실장이 차 인석에게 접근했다고 추측했다.

진우가 권 회장을 송 마담 집까지 태워다 주던 날이었다. 그녀는 논현동 주택가에 살고 있었다. 진우는 오 덕재를 통해 그녀의 집을 이미 알고 있었다. 크지는 않지만 아담한 개인 주택이었다. 그녀의 집이 있는 골목으로 천천히 승용차를 몰고 들어가던 그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뒷좌석의 권 회장이 외쳤다.

“엇~! 저, 저기.........”

송 마담의 집 담장을 넘어 나온 그림자가 맞은편 골목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집안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들어가려다가 나온 것이었다. 진우는 천천히 승용차를 그녀의 집 앞에 세웠다. 놀란 권 회장은 잔뜩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백미러를 들여다 본 진우는 평소 거칠고 급한 그가 의외로 겁에 질린 표정을 보고 쓴 웃음을 지었다.

“아무래도 놈이 다시 나타날 것 같습니다. 제가 살펴보고 있을 테니 들어가세요.”
“음. 그, 그럴까........!”

진우는 상대가 집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급히 몸을 숨긴 것이라고 판단했다. 승용차에서 내린 권 회장이 철문을 열고 사라진 후에 그는 예리하게 주위를 살폈다. 차에서 내린 그는 그림자가 사라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좁은 골목 끝은 대로로 이어져있었다. 그는 몸을 돌려 송 마담의 주택 옆의 작은 마트 간판이 붙은 이 층 건물로 다가갔다. 전신주를 타고 올라가 가볍게 마트 건물 옥상에 뛰어 내렸다.

그녀의 집 주변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어둠에 쌓인 골목길에는 주택과 불이 꺼진 상점들이 적막 속에 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송 마담의 집안이 드러나 보였다. 전등이 밝혀진 거실 안에 들어서는 권 회장, 잠옷가운차림의 송 마담이 무슨 말인가 주고받았다. 진우는 옥탑 옆의 에어컨 실위기 위에 걸터앉았다.

밤공기가 차가워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상대가 나타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 진우는 점퍼 깃을 세우고 벽에 등을 기댔다. 송 마담의 거실 안에 있던 권 회장의 모습이 사라지고 주방 전등불이 밝혀졌다. 피곤함을 느낀 진우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숙였다. 삼십 여분이 지났을까, 깜박 졸았던 그가 하품을 하며 눈을 떴다.

흐린 불빛이 스며 나오는 송 마담의 방 창문이 진우의 시야에 들어왔다. 창문 커튼 사이로 드러난 방은 침대가 놓인 침실이었다. 침대위에 그녀와 권 회장의 발가벗은 알몸이 하나가 되어 있었다. 엎드려 있는 권 회장에게 갇혀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높이 치켜든 허벅지가 흔들리고 있었다.

“.........!?”

그들의 모습을 관망하던 진우는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림자가 사라졌던 골목 담장위로 고양이가 튀어 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모지를 눌러쓴 그림자가 나타났다. 진우는 동물적인 감각으로 몸을 날려 전신주를 타고 내려섰다. 전신주 뒤에 몸을 숨긴 그는 철문 옆의 담장으로 다가오는 그림자를 예의 주시했다.

“.........!”

진우가 번개처럼 튀어나갔다. 담장에 매달리는 그림자의 목덜미를 잡고 넘어 드렸다. 땅바닥에 쓰러졌던 사내가 벌떡 일어나 그에게 반격을 시도했다.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사내가 휘두른 주먹이 그의 어깨를 강타했다. 한 걸음 물러선 그는 한 바퀴 회전하며 상대의 낭심을 걷어찼다.

“윽~!”

잠시 허벅지 사이를 붙잡고 쩔쩔매던 사내가 무엇인가 꺼내 들었다.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는 비수였다. 저돌적으로 진우의 복부를 노리고 들어오는 칼날! 바로 앞까지 다가온 비수를 손으로 내리친 그는 사내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무릎으로 사내의 턱을 가격했다. 비수를 떨어트린 사내가 털썩 주저앉았다. 그가 사내의 목을 팔로 감아 조였다.

“넌, 누구야? 네가 차 인석야?”
“윽~! 아, 아니.........이거 놓고 얘기해. 수, 숨이 막혀.....”

“우선 말해! 왜, 권 회장을 노린 거야?”
“권, 권회장이 아니라. 송 마담......! 송 마담을 위협하려던 거야......!”

“왜!? 이유가 있을 거 아냐.”
“난, 난 단지 돈 받고 일했을 뿐.......! 큭......! 이, 이걸 전달하라고.........”

입술이 터져 피를 흘리는 사내가 트럼프 카드 한 장을 꺼내 보여주었다. 권 회장이 말했던 스페이드 에이스 카드에는 CIS라는 이니셜이 적혀있었다. 그는 재빨리 사내가 떨어트린 비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숨을 몰아쉬는 사내의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젖혔다. 사내의 목에 비수를 겨냥한 그는 높낮이 억양이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구야? 누구한테 받은 거야? 차 인석!”
“나, 난 그런 사람 이름 몰라. 인터넷으로 일을 청탁 받았고 대포 폰으로 연락을 받을 뿐이야. 통장으로 선금을 받았고 일을 마칠 때마다 수고비를 받을 뿐이라고.”

“너희 같은 놈들의 상투적인 거짓말을 믿으라고!”
“으 윽~! 성이 차 씨라는 것은 들은 것 같아요. 하지만 상대를 만난 적도 없어요. 저, 정말이야! 사, 살려 줘요.”

진우가 겨냥한 비수 칼날이 사내의 목을 파고들어 피가 흘러나왔다. 사색이 되어 하얗게 질린 사내가 벌벌 떨었다. 그는 사내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하수인에 불과하다고 판단했다. 사내의 호주머니를 뒤져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사내의 복부를 걷어찼다. 벌렁 나자빠진 사내의 눈동자가 두려움으로 가득했다.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 거리지마~!”
“네~! 네.”

겁에 질린 눈빛으로 진우를 올려다보던 사내가 바닥을 엉금엉금 기더니 꽁지가 빠지게 골목 안으로 뛰어갔다. 사내가 사라지고 그는 사내에게서 뺏은 휴대폰을 살펴봤다. 통화내역이나 메시지들이 있었으나 분명치 않은 전화번호였다. 카드에 적힌 CIS라는 이니셜만으로도 고 실장이 만났던 차 인석을 더욱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계천에는 없는 것도 없고 못 만드는 것도 없다고 한다. 세운상가에서 동대문 상가로 이어지는 대로변에는 각가지 상품들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하다. 진우는 북적거리는 사람들 사이를 부지런히 걸어가고 있었다. 그는 줄지어 있는 공구 상점 간판들을 올려다봤다. 잠시 멈추어 섰던 그는 명인이라는 간판이 붙은 작은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둠침침한 상점 구석 책상 앞에 앉아있는 주인의 모습이 보였다. 탁상전등불 밑에 꾸부리고 공구를 만지고 있던 사내가 입구로 들어서는 진우를 힐끔 쳐다봤다. 진우는 그가 고 실장과 만났던 사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선 사내가 그에게 다가왔다.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십니까?”
“당신이 차 인석씨!?”

“그렇습니다만, 무슨 일로.........!? 헉~!”

진우가 대뜸 팔로 사내의 목을 감아 조였다. 숨통이 막혀 얼굴에 핏줄이 돋아난 사내가 눈동자를 크게 뜨고 허우적거렸다. 그는 사내를 끌고 뒤쪽의 문을 열고 나갔다. 잡다한 자재들이 쌓인 공터였다. 그의 주먹에 복부를 강타당한 사내가 신음소리도 못 내고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는 다시 사내의 멱살을 잡고 일으켜 세워 낭심을 걷어찼다.

“뭐, 뭐야~!? 왜, 왜........!?”

와르르 무너지는 자재더미 위에 벌렁 나자빠진 사내가 외쳤다. 진우는 묵묵히 사내의 목을 구둣발로 밟고 내려다봤다. 갑작스러운 상황으로 겁에 질린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벌벌 떠는 사내의 입가에 피가 맺혀 흐르고 있었다. 진우는 비수를 빼 들어서 사내의 목덜미에 가져다댔다.

“네가 사람을 시켜 송 마담을 협박하라고 시켰지? 아니면 권 회장을 노린 건가?”
“아, 아냐! 내가 아냐. 나도 돈 받고 중간 역할을 했을 뿐........”

“그럼 누구야!?”
“나도 몰라. 전화로 연락을 받았고, 통장으로 돈이 입금되었기에.......”

“정말 죽고 싶은 모양이군.”
“정말이라니까요. 나, 나는 그 사람이 가르쳐주는 데로 했을 뿐이라니까요......”

실망하지 않을 수 없는 진우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상대가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철저하게 자신의 모습을 감추고 차 인석까지도 이용하고 있었다. 진우가 차 인석의 멱살을 움켜쥐고 바짝 당겼다. 그리고 시퍼런 칼끝을 그의 눈 밑에 가져다댔다.

“장님으로 만들어 줄까! 네가 송 마담에게 앙심을 품었던 거지?”
“아니~!, 사. 살려줘. 그 사람은 내가 연희와 동거생활을 했던 것도 알고 있었어요. 난, 정말 연희를 사랑했어요. 단지 장사를 해서 만 질수 없는 큰돈이고, 혹시 그녀가 돌아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믿어줘요~!”

“...........!?”

사정조의 말을 흘리는 차 인석의 표정은 간곡했다. 진우는 어리석게만 보이는 그가 결코 범죄를 저지를 위인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어쨌든 그가 연류된 것만은 부정할 수 없었다.

“고 순철 실장은 왜, 만났어?”
“그........! 그 사람은. 관계없는 사람예요. 단지 연희 가게에서 우연히 만났고, 고아로 자라서 외롭다면서 자주 만나는 술친구이고, 물품 구입할 돈도 빌려주는 좋은 사람인데 ........”

“..........!?”

진우는 자신이나 마찬가지로 고 실장이 권 회장의 지시를 받고 의도적으로 차 인석에게 접근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굳혔다. 결과적으로 그가 지금까지 알아낸 범인에 대한 정보들은 고 실장도 알고 있다는 결론이었다. 하지만 범인에 대한 윤곽조차 인수 없다는 사실에 그는 허탈감에 젖었다.

아침에 권 회장을 출근시킨 진우는 휴게실에서 커피를 마시며 대기하고 있었다. 무심코 TV화면을 바라보던 그는 망연자실했다. 들고 있던 신문을 내려놓고 일어선 그는 뉴스가 진행되는 TV 앞으로 다가갔다. 목줄을 길게 늘어트린 남자의 모습이 화면에 클로즈업됐다. 송 마담의 룸살롱에서 고 실장이 만났던 차 인석이었다. 뉴스를 전하는 앵커가 사인이 자살일 것이라고 가정하는 경찰의 발표를 인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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