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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3 01:25 439회 0건
-九日-

-제 1 부 : 아무것도 아닌 시간부터-

항상 시간이 문제라고 느끼는 것도 일종의 정신질환이라고 동료가 말하는 것을 웃기는 소리라고 일축하던 것이 생각났다. 물리적으로 자는 시간까지도 까먹어 가면서 느껴야 하는 심리적 압박감을 내 스스로 불러 일으키는 것처럼 들리는 그 판단이 너무 싫었기 때문 이기도 했지만…..

‘별 거 없었지?’

‘응.’

난 질문이 원하는 답이 있을 경우, 내 의견을 구지 그 위에 덮질 않는다. 그걸 가리켜 동료들은 스스로의 시간을 벌기 위한 일종의 자기 방어이자,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심성을 고형화 시켜가는 자폐의 한 단계라고 서슴없이 얘기 하기는 해도 난 별로 마음에 두질 않았으니까.

‘근데, 자기야, 오늘은 목소리 톤이 쫌 까라진다, 그치?’

‘그래? 감기 기운이 있나?’

난 나 자신이 여자라는 사실에 대해 항상 긍정적인 시선으로 봐 주긴 하지만, 그는 나보다 더 여자 같은 구석이 없진 않다. 항상 나를 살펴 오늘처럼 목소리가 깔리는 분위기를 잡아내는 것 하며, 자주는 아니더라도 스타킹의 줄이 나간 것을 찾아내 주는 일들…..나 보다 더 세심한 그의 연출이 가끔은 성가시게 느껴지기도 한다.

‘밥알이 몇 개나 되디?’

‘응?’

‘너 지금 밥알 세고 있자너?’

항상 그가 나에게 던지는 싱거운 농담. 내가 식욕이 없을 때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나의 얼굴에 웃음을 찾아 주곤 한다.

‘오늘은 별로…. 그냥 그래.’

‘바로 들어갈래?’

‘아니….들어가면 또 뭘 해….극장 가자며?….’

‘도살장 가는 분우구 지대룬데 뭘….’

그러나, 그는 이미 저질러 놓은 말실수로 얼굴이 벌개지고 있었지만, 난 모른 채 하면서 물컵을 들어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그가 나에 대한 배려로 손꼽는 것 중에는, 죽음과 밀접한 장소를 언급하질 않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무의식 중에 스스로 망각한 것은, 이를 테면 자신의 찝찝한 감정이 조절불능으로 가고 있다는 적신호임을 의미했다.

‘아니, 내 말은…그게 아니구설랑….’

‘괜찮아….자긴 그럴 때 보면 너무 소심해….’

변명은 항상 길게 마련이고, 늘어 놓을수록 감당이 어려운 것을 잘 아는 두 사람이기에, 대화는 곧 끊어 졌다. 이럴 때는 내가 스스로 국면 전환을 하질 않으면 시쳇말로 그가 대놓고 삐치는 수가 다반사 인 것을 안다.

‘스케이트 장 구경이나 가자.’

‘어디, 멀리?’

‘아니, 시청 앞…..’

항상 이런 꿀꿀한 기분 일 때는 정신 없이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비적대다 나오는 것도 괜찮은 해결책이라고 주장하는 쪽은 항상 그였지만, 오늘은 내가 자청했으니 고생도 감수해야지 라는 결심을 억지로나마 해본다.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걸리적 거리는 거, 싫다 할 때는 언제고…. 나 때문이니? 일부러 그럴 거면 관둬…..’

‘아냐, 네온사인 구경도 그런대로 볼 만 하잖아?’

그는 무딘 나보다 눈치가 빠르긴 했다. 뒷북의 여왕이라고 놀림을 당해도 난 그게 욕이라고 느껴본 적은 없다. 그와 둘이서 한밤의 네온사인이 눈부신 시청 앞의 스케이트 장 주변에 도착했을 때는 정말이지 머리가 터져 나갈 것처럼 짜증이 솟구치고 있었다.

‘괜히 왔다 싶지?’

그 말은 맞았다. 더구나 무어가 그리도 즐겁고 행복한 지, 그 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인파의 복작거림 조차 흥을 돋구고 있다는 표정이었고, 난 그 단순한 여유조차 이해하려고 들질 않았다.

‘어허, 이거 뭐이….’

사람들에게 떠밀려 나를 향해 체중이 실리는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던 탄식…..그러나, 그것은 그냥 지나가는 인파의 물결 때문이 아니었다. 고개를 갸우뚱 하여 사선으로 쳐다본 그의 후면에는 어떤 여자가 인파를 배경으로 스스로를 찍고 있는 모습이 들어왔고, 그 흔한 셀카봉도 없이 머리에 꽃이나 꼽았다면 대번에 직무구분이나 당했을듯 싶은 포우즈를 연출하는 실루엣으로 인해, 난 별 희한한 여자도 다 보겠다는 심정이 들고 있었다. 그 역시, 힐끔 거리고 뒤를 바라 본 연후에 나에게 속삭였다.

‘찍어 줄 남친도 없는 모양이다. 증말 불쌍타, 그치?’

그러나, 그 여인은 주위에 아무도 의식하질 않는 분위기 였다. 그저, 자신의 손으로 핸폰의 셔터를 누르고 있을지언정, 그녀의 표정에서는 누군가 그녀를 향해 이 화려한 네온사인과 행복해 보이는 인파를 배경으로 하여 누군가에게 얼짱각을 선물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으니까.

‘미쳤나?’

그의 판단은 언제나 미숙한 구석이 있었다.

‘자긴 남을 살피는 관찰력은 꽝이야, 그거 알아? 저 여자, 셔터를 누르는 그 사이 사이로 뒤로 고개 돌려 배경 살피는 거 보면 몰라? 누구에게 특별히 보여 주려고 찍는 거지, 그게 미친 거로 보여?’

같은 여자로서, 난 그 여자의 행동을 따라 할 수 없는 것 만은 분명했다. 나 자신, 주변의 상황들을 억지로 인식하고, 경계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지라도, 무엇에 도취된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향해 셀카를 찍어대는 그 부자연스러움을 연출할 용기가 솔직히 없다고 하는 표현이 옳았다. 그 여인의 얼굴은 지극히 평범했고, 누구에게 보여주려는 목적이었다면 그 상대가 누구인지 궁금하지도 않을 성 싶게 밋밋한 느낌이었다. 10분만 지나서 그 얼굴을 기억하려면 거의 불가능 하다고 여길 정도의 평범한 그 턱선 과 완만한 콧날….

‘찰칵, 찰칵..차차칵칵칵…..’

난 어느새 그 여인에게 집중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까지 각도를 달리 하며, 찍어대던 그 여인의 자세가 서서히 고정 되는가 싶더니, 배터리가 다 닳을 것처럼, 연속적으로 들리는 그 셔터 음…..그리고, 충전이 되기도 전에 눌러지는 그 간격으로 인해, 플래시마저도 몇 번의 굼뜬 껌벅거림으로 타이밍을 놓쳐갔다. 난 그 자세에서 셀 수 없이 많은 고정 자세로 찍어대던 핸폰을 거두어 들이는 그녀의 눈가에서, 때 아닌 눈물이 주르륵 흘러 내리는 것을 보았다. 핸폰을 가방에 넣고서 고개를 수그린 채, 얼굴을 훔치면서 황급히 그 자리를 뜨는 그녀를 가리켜, 그는 신데렐라의 마법이 풀렸다고 우스워 했지만, 난 그 장면이 더욱 또렷하게 망막에 남아 버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긴 그 여자 얼굴 자세히 봤어?’

‘아니, 기억에도 없네. 근데…..자기 특이한 데 관심 있다?’

난 그에게 묻고 싶었던 것이 얼굴이 아니라 눈물이었는데도,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다. 그 날 저녁, 그의 품에서 흥건한 땀을 빼고 돌아 누워 잠을 청하려 해도 난 쉽사리 눈을 감질 못했다. 그가 싫어하기 때문도 그랬지만, 흡연 습관을 절대 끊지 못하는 나 자신조차 옷에 담배 냄새가 남는 것을 싫어하기에 알몸으로 욕실에 들어가 담배를 피워대면서도 그 장면은 무언가 깊은 여운을 나타내면서 긴 꼬리를 내 앞에서 흔들어 댔다.

‘지이이익……지이이익…..’

그건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 놓은 내 핸드폰이 울려대는 진동 소리였다. 난 진동 기능에 대한 맹신으로 인해 핸드백 안에 들어 있을 때 연락이 와도 주위로부터 일부러 통화를 씹는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편인데다 습관을 버리질 못하는 불량하고 무식한 사용자 였지만, 그는 부득부득 진동모드를 혐오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를 준다는 이미지를 최소화 하기 위해, 전번에 따라 세세하게 컬러 링을 다르게 맞추어 놓는 편이어서 전번을 확인하기 전에 대강 누구에게서 온 것이란 확인을 주위 사람들에게 서슴없이 통보하는 것이 나와 지극히 달랐다. 난 가격대비 반비례하는 단순 무식한 기능의 전화기를 들고 다니는 격이었고, 그는 유용한 문명의 이기를 소유하고 있는 셈이었다.

‘네…..네…..네…..’

난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가 깰 까봐 조곤 조곤 대답만을 하고 통화를 끝냈지만, 잠귀가 밝은 그는 그 소리에 깨어 나를 멀끔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 그제서야 아무 것도 걸치지 않은 채, 벌거벗고 서 있었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한기가 엄습하면서, 수치심을 느낀 것처럼 시트를 몸에 말아 둘렀다.

‘자기, 그런 눈으로 볼 때, 정말 이상하더라.’

‘뭐가?’

‘꼭 아무 상관 없는 여자가 자기 앞에서 벌거벗고 있는 듯한 눈초리….정말이지 그럴 때는 내가 사귀고 있는 사람 맞나 싶다니 깐? 정내미 뚝뚝 떨어진다는 말이지, 뭐긴 뭐야…..’

‘내 눈이야 그런 말 하도 많이 들어서 이젠 별 무감감 이네…..근데, 어디서 온 전화야? 지금 나오래?’

‘아니…..내일 아침 일찍 좀 나와 줄 수 있느냐고, 신박께서 아프시대요….어시스트랍시고 나란 사람을 데려다 놓았으니, 계급사회처럼 끝 발로 밀수도 없고, 제일 점잖은 압력이 이 시간대의 전화질이 고작이지 별 수 있겠어?’

‘그렇게 지지리 궁상 이라면서, 그 놈의 어시스트는 해서 뭘 해? 조건이 나아져 뵈는 게 하나뚜 없다며? 애저녁에 시작했어도 4급 되려면 주구장창 이라며? 그냥 병원 판독실에나 남았어야 하는 게 더 나은 초이스 아니었을까? 아님 새로 유학이라도 고려했어야 하는 게…....’

‘이제 와서 따지면 뭘 해….그나마 홍이점이란 자랑으로 뻗치고 있는데…..예전에는 어시스트란 것도 없이 북치고 장구치고 다 했대요. 홍일점 선배 쉬고 나면 빛 보겠지 뭐…씨…..나중에 방송국에서 나 주인공 시켜주는 드라마 라도 안 찍으면 가만 두나 봐.’

‘하이구, 뼈 빠진다며, 골골 할 때는 언제고….1년 평균 한 사람 당 248회라며, 치를 떨던 사람이 누군데…..그 놈의 해외 출장도 사람이 떼사리로 죽어야 가는 놈의 구석…….그 숫자, 하도 자기가 이가 갈리도록 반복해서 나도 다 외운다니 깐?’

그건 그랬다. 다들 열악한 환경에서 그나마 발을 담그고 있는 위치에서 사명감이라 부르기에는 뭣 하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의사라는 개념 보다는 장인정신을 길러 간다는 측면에 더 가깝게 살아온 듯도 싶었다. 생명을 구한다라는 의술 본연의 기능은 이미 포기한 지 오래고, 요즈음 이 방면을 따라 흘러 들어 온 젊은 어시스트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아낌없이 퓨젼 이라고들 불렀다. 어떤 기자는 신참이었던 나를 가리켜 웬디라는 호칭을 붙여 준 일도 있었다. 자신의 사망 사실조차 망각한 채 헤매는 피터팬이란 불쌍한 영혼을 위해, 떠도는 죽음의 그림자를 제자리로 꿰매어 주는 자상한 비전공 엄마라는 의미에서 붙여준 별칭이었지만, 별로 나쁘진 않다고 생각해 왔다. 항상 삶과 죽음의 곡예 속에서 의술의 가치를 재인식하는 보편적인 의사로서의 위치가 아니긴 했지만, 매일 죽음의 언저리와 그 암울함을 반복적으로 대하면서도, 그 시신들이 캐치프레이즈처럼 내 걸고 있는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어 줄 수 있는 마지막 종착역이란 점에서는 나름 의의가 있다고 자위하게 했던 시절이 있긴 했으니까 말이다.

‘내일 아침까지 같이 있을 거야, 아님?…..’

벌써 그는 판이며, 흥이 모두 깨졌음을 내비치고 있었다.

‘씻고 가야지…..여기서 아침에 일 나가긴 쫌 그래. 자긴 내일, 뭐 할건데?’

‘엿 같은 주 5일 근무, 하면 뭘 하나? 남은 시간 놀러 갈 돈이나 여유 있게 주든지, 아님 짤린다고 겁이나 주질 말던가, 이건 뭐….그렇다고 애인이 주말을 맞이 하야 더 붙어 다녀주길 하나?’

‘그럼 그런 애인 찾아 가시던가?’

‘그렇다고 성질이나 녹녹해야지……’

‘내주에는 어디 가까운데 라도 가지 뭐……삐지는 거 자주 하면 버릇된다, 응? 아가야?’

난 그나마 그를 달래야 했다. 그를 만나고 나서 난 오랜만에 무언가를 제안한 셈이었다. 항상 그가 원하는 코스와 계획, 흥미 위주로 말없이 따라다녔기에, 내가 어디로 가자고 하는 신선한 발언은 그의 푸념을 단시간 내에 제압할 수 있는 기능도 갖고 있을 뿐더러, 난 그와의 실랑이가 이제 점점 피곤한 주제라는 사실을 인식할 정도로 나름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와의 섹스가 많은 부분에서 서로의 빈자리를 채워 준다는 사실에 감사하던 연애 초기와 달리, 요즈음의 상황은, 뭐랄까 허기진 상태를 면하게 해주는 느낌이 강했다. 그저 만나면 그게 코스의 끝이려니 하면서 받아 드는 디저트 같이, 어쩌면 나는 그렇게 드라이 해져가는 두 사람의 관계가 오히려 부담스럽지 않아서 좋다고 느끼는 뻔뻔함을, 관계가 무르익었다는 단어로 바꾸어 부르고도 싶었으니까 말이다.

‘그 여자 말이야…..’

그가 나를 집까지 바래다 주면서 스케이트 장 주변에서 마주친 그 여인에 대해서 다시 얘기를 꺼냈다.

‘왜, 관심 있어? 막 끌리고 그래?’

‘어허, 농담두……그건 아니라고 봐. 근데, 그 여자 생각할수록 묘한 분위기 였거든….’

‘무슨 분위기?’

‘글쎄……자신의 세월 속에 살아가고는 있지만, 주변과의 시간 개념에서는 멀찌감치 벗어난 듯한 느낌….어렵지?’

‘이를테면?’

‘음….사형수가 바라보는 하늘을 향한 마지막 시선 같은 거….와, 달밤에 표현, 막 나간다…..’

‘자긴 관찰력은 꽝인데, 설레발은 끝장인 거 알지?’

난 그 주제를 농지거리로 받았지만, 두 사람 모두의 가슴 속을 적지 않게 흔들었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집 앞에서 간단한 키스로 마무리하고 돌아서는 나에게 그는 언제나처럼 전화 하란 수신호를 하면서 차를 돌려 사라졌다.

제일 끔찍한 느낌을 들라치면 아침에 튀어 나가던 상황 그대로 벗어 놓은 팬티와 츄리닝, 옷가지 들이 빨래 바구니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바닥에 나뒹구는 모습, 그리고, 고치에서 날름 빠져 나온 듯, 그 주름과 들추어진 곡선들이 완벽하게 살아 있는 이불 등이 얼어 버린 것 마냥, 내 앞에 다시 보여질 때 였다. 급하게 들이키다 반쯤 남겨진 오렌지 주스가 노란 가래처럼 컵면에 말라 붙은 정지 화면과 미등도 켜놓지 않고 나선 바람에, 어둠 속에 숨죽이고 있었던 방 안의 공기가 희미한 거북함을 코끝으로 전달할 때, 혼자라서 괴로운 느낌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점 이었다.

다 늦은 시각에 집안을 정돈한다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지만, 도저히 그 상태로는 눈을 붙일 수가 없었다. 혼자 살다 보면 버리려 해도 버릴 수 없는 순서의 집착이란 것을 끼고 살아야 한다. 특히나 정리정돈은 더더욱 그랬다. 반드시 휴지통을 갈고, 그 다음으로 옷가지를 정리한 뒤에, 다시 들치고 들어갈 침대일 망정, 사람이 자지 않은 것처럼 커버까지 얌전히 씌우는 등의 순번을 결코 어긴 적이 없다는 걸 보면 안다.

모든 정리정돈의 마무리는 쓰레기의 분리수거와 손바닥이 벗겨질 정도의 세심한 세척, 그리고, 연이은 샤워였다. 친구들은 기왕 씻을 거 샤워할 때, 손을 씻지 뭐 하러 두 번씩 그 지겨운 행위를 반복하느냐며, 나를 가리켜 입을 모아 공순이라고 불렀다. 결코 그 명칭을 실제로 소유하는 계층을 폄하하자는 의도 보다는, 내 자신이 갖고 있는 단순반복 행위에 대한 자연스러움을 꼬집는 비아 냥이란 것을 잘 알지만, 그걸 두고 발끈 할 수만은 없었다.

‘지이이익…….지이이익…….’

못 보던 전번이었다.

‘네……’

난 업무상 음성으로 칼칼한 여운을 주면서 길게 대답하는 버릇이 있었다.

‘신박사님께서 편찮으시다 길래, 이렇게 대신 전화 드렸습니다.’

시각이 한 밤중이라 미안하다는 말과 신박에 대한 단어가 같이 튀어 나오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급한 부검에 대한 건이란 예감이 감돌았다.

‘네…..바쁘신 것은 알겠는데, 저희들도 처리해야 될 건이 많아서…., 부검여부를 결정하는….현장검증을 필요로 하는 게 아니라…절차 전에 그러니까……...네…뭐 그런 식이죠….생검이 아니라, 검안 정도의 수준으로……. 자리에 참석만 해 주시면….허허….뭐 솔직히 서로 간에 일을 좀 덜까 싶어서요……네, 뭐 그렇죠…..설득이라 기 보다는…..예외적이긴 해도…….부검의 불필요성을 재확인이라도 시켜 주시면…..네…그런 거죠…… 유족이 요청하고 있긴 한데, 제가 보기에는 영 아니라서요…..뭐 연식은 별로 이긴 한데…..아직까지, 보험이나 그런 걸로 불똥이 튈 껀수는 아닌 것 같고요……..척 보면 뭐 그런대로…네…범죄 현장이라고 보기에도 그렇고…네…..그럼요….사실 절차대로 하면 검사님 거쳐서 이틀은 걸리고, 왔다 갔다, 잘 아시겠지만 서도….…. 단순 심장발작에 의한 돌연사 처럼 보이는데, 가족들이 성화가 만만찮아 서리…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그 형사님은 소설 쓰기도 귀찮은 모양인지, 한 사람의 죽음을 그냥 잡무의 일과 정도로 처리하고픈 심정이었던 모양이다. 귀차니즘의 전형전인 모델……그저 단순 돌연 사로 결정지어 후딱 장례라도 치르고 나면 산 사람들은 금새 잊고 만다는 속성을, 너무도 잘 아는 그의 직무 유기성 발언…예전에는 그런 몰인정과 비인간적 무관심을 혐오하기도 했지만, 나 자신도 그들과 같은 부류에다 한 통속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것을 딱히 부정하기도 어려웠다. 안 나갈 수도 있었지만, 신박의 병가가 가져다 주는 홀가분함 보다는 범이 없는 곳에 여우가 왕이라는 식의 뒤틀린 주인의식이 나에게 코트와 가방을 기어이 들게 하고야 만다.

‘가죠…..아까 말씀 하신 주소... 다시 한번 알려 주세요……네……이 곳에서 멀진 않네요….사망 확인을 어느 의사가 했다고 하셨죠?…..네…네…..아직 시신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고….’

나는 출발 하기에 앞서 정식적인 부검 동의서와 의뢰 절차, 검찰로부터의 사체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현장에서의 검안이긴 하지만 공식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범죄 현장이 아니기 때문에 상식 선에서의 조언밖에 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사실 신박이라면 범죄와의 연계성이 전무하다는 판단이 들 경우, 평소의 살인적인 격무와 일정때문에라도 이런 건수는 대번에 노코멘트에다, 절차를 밟으라는 호통으로 전화를 끊었을 것이 분명한 일이긴 했다.

항상 말로는 현장 보존의 필요성이나, 과학 수사의 첫발은 초동 시점의 과학적 증거보존과 채취라고 역설하면서도 그 현장을 처음 목격한 경찰 인력들의 관심사나 범죄와의 연계성이 도무지 희미할 경우, 부검은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 혹은 유교적 내력을 들먹이면서 시신에 손을 대는 것이 유익한 것만은 아니라는 쪽으로 관심을 지워버리려는 은근한 유도가 있어온 것을 잘 아는 나였다.

나 또한 택시를 잡아 타고, 현장으로 가는 도중에도 도착해서 어떤 얘기를 해주어야 손을 떼고 한 건이라도 수고를 덜 수 있을까 골몰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 사람이 죽어간 시점을 제쳐 두고 라도 그 사실을 이렇게 떠 맡기 싫은 짐짝처럼 관련자가 도외시 한다는 사실이 조금은 심정의 까끄라움으로 남기는 했다. 항상 이럴 때면 내가 의문사를 당했다 해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런 상황으로 똑같이 내동댕이 칠 것을 예상하며, 몸서리를 치는 적이 다반사였기에.

‘그래서 가족이 있어야지…..’

‘네? 손님, 뭐라고 하셨죠?’

‘아, 아니에요…혼자 소리에요…..그냥…’

난 창 밖을 보면서 혼자 소리를 너무 크게 질렀던 것을 창피스럽게 생각했다. 누가 보면 정신이 나갔거나, 망년회든, 사랑놀음 이든 간에 술로 뻑이 가서 해롱대는 매친년이란 시선으로 누군가 지켜 본다는 사실이 싫어서 였다.

‘손님 말씀이 백번 지당하죠…..살인자도 면회 오는 사람은 부모 형제 밖에 없습디다. 피를 나눈다 라는 게 뭐겠어요? 슬픔도, 기쁨도, 괴로움도 대가없이 같이 하겠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난 이치에 똑 부러지는 정의를 내린 기사 분의 바른 생활 지표에 감탄 하는 척 동조해 주면서도, 내 혼잣말을 다 알아 들었지만 못 들은 척 되물었던 그 얌체 같은 태도가 더 얄미웠다.

‘아시는 분이 사시나 봐요?’

‘아뇨, 그냥….왜요?’

‘그 지역이 쫌 그렇거든요…..제가 그 근처 살아 봐서 아는데, 가시는 그 주소가 아파트 랍시고, 덜렁 하나, 지어져 있긴 한데, 오래되기도 했지만, 지지리 궁상 동네 한 가운데에 세워 놓았으니, 그게 어디 아파트 구실을 하겠어요? 그나마 그 주변 땅 재개발 소식이 있어서, 기를 쓰고 딱지나 얻어 대려고 눈 질끈 감고 응댕이 깐 사람들이 대부분 이고요. 밤엔 나다니는 게 쬐금 그런 동네죠…..삥 뜯는 양아치 쇄끼들도 많고, 암 튼 그런 차림의 아가씨가 밤에 혼자 다니시기에는….허허….’

벌써 기사 분은 나의 차림새를 파악하고 나서 하는 소리였다. 그 동네와 어울리지 않는 차림과 장신구, 분위기를 두고 견주어 내리는 그 나름대로의 판결문이기도 했다.

‘오래 있지 않을 거에요.’

‘아, 그러시군요…..거의 다 왔는데…..근데..., 이 밤에 경찰차에다, 앰뷸런스까지…뭔 일 났나?’

‘더 들어갈 수 없나요?’

‘죄송하지만, 이쯤에서 내리셔야 하겠는데요? 저 골목을 지나면, 돌아 나올 구석이 없어 놔서…….’

‘수고 하셨어요….운전 조심하세요.’

‘그래 야죠. 이럴 때는 뒷골이 서늘한 적이 많아서리……손님 내려 주고 나서 돌아다 보니, 손 안에 지폐대신 낙엽만 잔뜩이라는 둥……저 앞에 앰뷸런스를 보니, 아가씨 얼굴이 다시 뵈지네….그건 아니죠?’

‘아저씨, 조크, 정말 엽기다. 한 겨울에…..’

난 택시를 내리면서도 그 기사의 얼굴 표정이 너무 우습다는 생각을 했다. 기어이 내가 그 아파트의 입구를 통해 사라지는 것을 볼 때 까지, 시선을 떼지 않는 그 어설픈 표정…..난 입구를 들어서면서 무의식 적으로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손목 시계는 오래 전에 멎어 있었다. 그와 만나기 전까지도 확인했던 시간이었는데…….단지 손목시계의 배터리가 소모되어 시간이 멎어 있었을 뿐인데, 난 그 사이의 모든 기억이 얼어붙어 버린 것 같은 황망함이 가득해 지고 있었다.



-제 2 부 : 사소한 부드러움 때문에-

‘어, 정말 빨리 오셨네요…..’

내 앞에 서 있는 젊은 형사님은 다부진 몸매와 정반대의 고운 남자 음성을 가진 분이었다.

‘아까 전화 주신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선배님은 다른 곳에서 호출이 오셔서…..제가 대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망 현장을 보았어도 담당자가 현장을 지킬 필요성을 느낄 수 없었다는 선입견은 내내 나를 괴롭히는 빌미이기도 했다. 가족들은 달랑 모친으로 보이는 노인 한명 뿐이었다. 차림새나 색감조차 나이에 맞게 적절한 선을 유지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집의 유복한 자식과 어머니의 관계라고 보였다.

‘시신을 좀 볼까요?’

동네의 구차스러움과 다르게 실내는 깔끔하고, 꽤나 신경 써서 가꾼 것처럼 보였지만, 여자의 손길은 느껴지질 않고 있었다.

‘혼자 사는 분이었네요…..’

‘어, 그걸 어떻게 아세요?’

‘우선 현관에 있는 신발들을 보면 알죠. 게다가 거실에 있던 가족 사진으로 보자면, 사망하신 분을 제외하고 네 명이어야 하는데, 유족은 그 사진에 있지도 않은 모친 한 분이고……게다가 주변의 살림살이들이 다섯 명의 가족을 기준으로 놓여진 흔적이 없고요…..’

‘네. 맞습니다. 사망자는 43세, 이름은…..’

‘아, 저에게 보고하실 건 없어요. 정식적인 검안 절차가 아니라고 말씀 드렸는데…..못 들으셨나요?’

난 현 시점까지는 내 소관이 아니라는 것에 강한 영역 표시를 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좁은 거실의 소파에 외롭게 멍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다 보고 있는 늙은 노모에게 혹여 내 발언이 졸지에 아들을 잃은 심정 속으로 처참한 못질을 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에, 버벅대는 신참 형사님의 민한 태도가 못마땅하기만 했다. 난 되도록 티를 내지 않으면서 시신 곁으로 다가갔다. 평소처럼 장갑을 현관 앞에서부터 끼고 들어섰기에 그 형사님으로부터 오해를 살 수도 있었겠다 는 생각은 나중에서야 하게 되었다.

‘아주 곱게 잠든 것 같죠?’

시신은 잠옷도 구겨짐이 없고, 얼굴은 평안했다. 단지, 임종 직전까지 통화가 계속 되었을 것 같은 핸드폰 만이 한 손에 들려진 채였고, 두 눈을 뜨고 있는 것이 특이했다.

‘시신을 처음 발견한 분은 누구죠?’

‘모친 입니다. 이틀 동안 연락이 두절되어 결국 관리실을 부추 켜 문을 따고 들어 왔지요.’

‘달랑 이틀 인데, 연락 두절로 전전긍긍…..그건 쫌 그렇네…’

‘없어진 물건도 없었다고 그러시구요, 보시다시피 시신은 저런 지경이었고….’

‘같이 사시지도 않았다면서, 어떻게 물건이 예전과 그대로라는 걸 아셨다지요?’

난 내 영역을 슬슬 넘어가고 있었지만, 그걸 느끼질 못하고 있었다.

‘기러기 가족이었답니다. 밑반찬이네, 뭐네 틈틈이 저 모친이 드나드셨고요. 뭐, 그렇고 그런 뻔한 스토리 아닐까 싶은데요. 남편은 뼈 빠지게 돈 벌어서 쏘아 댔는데, 부인은 애들이랑 유학이랍시고 가서 탱자탱자 놀러 댕기며 돈 쓰면서 몸이나 굴리고, 그러다 남편은 과로로 쓰러지기 직전에 부인으로부터 난 여기가 좋으니, 죽이 되든 똥이 되든 한국에서 돈이나 부쳐라. 뭐 이따우 전화 받다가 열 받아서 골로 간 게 아닌가 하는….’

‘방송국으로 취직하실 걸 그랬나 봐요. 요즘 드라마 열나 재미 없던데….’

난 그렇게나 스토리의 진부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 작가들의 책임이 아니라 조금만 비틀고나면 바로 식상해 버리는 이른바 냄비성 민심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다시 한번 하고 있었다.

‘부인과 통화 중이었다 치고….., 이틀이 지났다면…., 누군가에게라도 이 곳의 상황을 알리지 않았을까요? 그래도 가족은 가족인데, 급히 비행기라도 타고 들어왔을 듯 싶은데…..핸드폰은 조사해 보셨나요?’

‘그게, 배터리가 다 되어서…..통화내역을 알려면 일단 증거물로 수거해서 충전도 해야 하고…..일단 밖에 계신 어머님께 아들의 사망 소식을 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알리라고는 했습니다만…..’

‘그런데요?’

난 시반을 살피는 도중, 또 다시 시신과 전혀 무관한 질문을 뻔뻔하게 해대고 있었다.

‘그게…..저도 옆에 있었지만……..전화가 연결이 안되더랍니다. 없는 결번이라고만 빽빽 대고, 집 전화도 부인이나 애들의 핸드폰도 모두 번호가 연결이 되질 않더라 는 거죠. 부쳐 주는 돈도 싫으니 그냥 지들끼리 날라버린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평소에 먹던 약이나, 지병이 있었는지, 혹시 여쭈어 보셨어요?’

‘3년 전부터 혈압이 좀 있어서 약을 복용했지만, 지금은 먹지 않을 정도로 나름 건강했다 하시네요.’

사실상 육안으로 보아도 남자의 체격은 비만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혼자 사는 티를 내어 가며, 영양 불균형을 나타내는 형상도 아니었다.

‘저 컴터는 누가 켜 놓은 거죠?’

주객이 전도되어도 보통을 넘은 수위였다. 난 내가 왜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지 영문을 알 수도 없었을 뿐더러, 사전에 고지한 영역과 수위에 대한 기준을 스스로 파괴 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걸 애써 무시하고 있는 내 자신이 이해되기 어려웠다.

‘암껏두 없더라구요. 프로그램이고 뭐고, 컴터가 맛이 갔는지, 포맷하고 윈도우를 다시 깔고서 아무것도 새로 인스톨 하지 않았나 봐요. 메신저도 없었고….. 저 시푸르등등한 언덕 화면……윈도우 새로 깔 때마다 을마나 열 받는데….그걸 그냥 놔 둔 걸 보면 컴터 에도 별 흥미가 없었던 듯 싶기도 하고….’

‘유족 분을 뵈어야 할까 봐요.’

‘그러시죠.’

난 시신에게 걸어야 할 관심사가 사전에 그어진 선으로 인해 더 이상 진전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자, 그 모친과 얘기를 나누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대답도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는 모친에게 말을 꺼내는 것조차 무척 힘든 순간이란 것을 느끼자, 가슴 한구석으로 무거운 돌덩어리를 매단 채 깊은 바닷속으로 말려 들어가는 답답함이 한가 득이나 밀려 들었다.

‘착한 애였는데…..’

죽은 아들이 장년의 나이였음에도 그 노모의 눈에는 아직까지 성장을 계속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부검을 원하신다고 하셨죠?’

‘………..예…..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아이가 아닌데……정말 건강했는데……다른 기러기 아빠처럼 맥없이 죽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말라고 했는데…자긴 다르다고 하면서…저…. 이 늙은이가 잘 몰라서 그러는데….부검이란 게 꼭 죄를 저지른 자가 있어야 받을 수 있는 건 아니지요?’

그런 와중에도 많이 배운 듯한 침착한 어조와 차분한 태도의 그 노인은 유복한 환경에서 살아온 것이 분명해 보였다. 부부간에 해로하다 배우자를 잃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을 것 같았고, 남겨진 재산도 넉넉한 듯, 궁핍해 뵈지 않는 얼굴과 차림이 그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네, 그럼 요…..때에 따라서는 자신도 모르는 병을 갖고 있다가 부검을 통해 지병이 밝혀져 거액의 보험금을 예상치 못하게 수령하게 되는 경우도 있죠. 원하시면 절차를 밟아 진행하세요. 그러라고 저희 같은 사람이 있거든요.’

난 맨 처음 의도와 다르게 부검을 재촉하는 입장이 되어 있음에 놀라고 있었다.

‘고맙구려……여자의 몸으로 남정네 들도 겁낼 일을…..’

‘그냥 직업이죠….혹시라도 억울한 사연이 있으면 아드님도 편히 눈 감으시기 어려우실 겁니다. 가족분들과 연로하신 어머님을 이렇게 남겨두고 앞서서 세상을 등진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 생각 되서요. 아드님의 사망과 관련해서 다른 이유나 연관이 있는 일들이 있을 까요? 드시던 약도 그럴 수 있고요, 심적인 고통을 주었던 다른 요인이 있었을 수도…..’

‘없어요….얼마나 성실하고, 밝은 애 였는데….제가 왔을 때에도 직장에서 돌아와 집에 오면 씻고, 외출은커녕, 밥 먹기 무섭게 컴퓨터만 하다가 자는 애 였어요. 술도 안 마시고, 혈압이 있다고 담배도 끊었던 애 였는데…..’

난 그 집을 나오면서, 뒤통수에서 악다구니에 가깝도록 궁시렁대는 그 신참 형사의 전화질을 들으면서도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나 스스로 간단명료하게 일을 걷어 버릴 껀수를 유족까지 들쑤셔가며, 제발 보험이나 들라는 식으로 부검을 권유했으니 그럴 법도 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꼬박 이틀간의 절차가 끝나고 나면 누군가의 손에 부검이 되어질 그 남자에 대한 주변은 많은 의문부호로 나에게 되돌아 오고 있었다.

‘…..무섭게 컴퓨터만 하는 애……’

범죄 현장이라는 부담에서 벗어난 상태라 그런지는 몰라도 난 그런 모순된 특징들이 평소와 다르게 뚜렷이 기억되고 있기도 했다. 컴퓨터에 열심이었다는 사람이라면, 평소의 습관 상, 항상 사용하던 상태 그대로 유틸리티와 프로그램들, 그리고 보관해 두었던 백업 데이터들을 예전처럼 되돌려 놓는 것이 상식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무엇이 그 남자로 하여금 그렇듯 유치원 놀이마당 같은 형태로 컴퓨터를 초기 상태로 되돌려 놓아야 했을까라는 의문은 좀처럼 지워지질 않았다.

이미 하드디스크는 포맷을 했을 터이고, 예전의 상황을 다시 가늠한다는 것은 그 남자에 대한 철저한 신분과 자료를 들이대지 않고서는 알기 어려운 것이어서 그 의문은 더욱 농도가 진해져 만 갔다. 컴퓨터를 그 지경으로 해 놓았을 때에는 미루어 짐작컨대, 경찰은 그 남자의 핸드폰 속을 뒤져 통화 내역을 조사한다 해도 별 수확이 없을 거란 예감마저 들었다.

그 남자 만이 세상에서 조용히 사라져 갔을 뿐, 그가 속해 있던 실제 사회, 혹은 익명으로 이루어져 있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의 활동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은 누가 일부러 들추어 내지 않고서는 영원히 묻혀 버릴 수 있는 구석이 다분했다.

더구나 범죄행위와 연관됨이 없다고 조서마저 올라간다면, 사이버 수사대의 수사가 이루어질 리도 만무하고, 어쩌면 그 남자의 죽음은 아무런 단서도 없이, 처음 그 경력이 빵빵 하다던 고참 형사의 부탁처럼 단순 심장발작에 의한 돌연사로 귀결되어 부검조차 검사의 허가를 얻기 어려워 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가족들과 연락이 되질 않는다 하대요……’

그 남자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 물리적인 영향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지극한 의문이 아닐 수 없었다. 잠옷 차림에 그것도 누워서 지병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복용하는 약도 없이, 심장 발작을 일으킬만한 충격과 가슴 떨림이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기러기 가족의 상황이라고 할지라도, 또 전화를 통해 감정이 격해졌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워서 감정을 터뜨리지는 않는 것이 상식이라 알려져 왔다.

그렇다면 소리를 치다가 벌떡 일어나기도 하고 전화기를 든 채로 방안을 서성이다 쓰러졌다면 아까의 상태처럼 곱게 눕는 자세가 오히려 조작된 듯이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난 싫어도 물밀듯이 부검실로 실려올 시신이 될 것임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그 남자의 사인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이 슬슬 겁이 나고 있었다.

‘왜 이러는 거야? 나 마저 소설을 쓰고 있잖아…..’

나도 그 신참 형사와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증거에 입각한 추론만이 진실일 뿐이라고 주장하던 신박의 강변이 귓가에서 맴돌고는 있었어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 남자의 사인에 대한 의문은 나 나름대로의 스토리 메이킹으로 빠져들게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비이이이익.…비이이이익…..’

백 속에서 잠자고 있던 내 핸드폰이 다시 울고 있었다.

‘……..안 잤어?’

‘어디야? 시끄러운 걸 보니 밖인가 본데, 집 코 앞까지 데려다 줘도 집을 못 찾아 가나? 하여간 노처녀 티를 내요, 티를….어딘데?’

‘응, 현장이야…다 끝내고 돌아가려구…..’

‘하도 잘자라는 전화가 없어서 내가 했네….내일 아침에야 가 볼 거라며?’

‘이 꼼꼼하신 성격이 아침나절 까지 기둘릴 수가 있어야지….잠도 안 오고…..’

‘하여간….너 그거 직업병이다. 결혼 하기 전에 고치지 않으면 BS때릴 줄 알어.’

‘BS는 또 뭐래?’

‘에프터 서비스 반대지, 뭐긴 뭐야. 비포 싸비스라고 알랑가 모르겠네…어여 집에나 들어가….그럼 내일은 신박도 안 계시고, 쫌 할랑 하실런가?’

‘죽은 사람들이 신박 보고 찾아 온다니? 우리 사정 안 봐주고 꾸준히 밀고 들어 온 지가 언제부터 인데….잔소리 자꾸 하면 나 그냥 물 좋은 데로 바로 튄다, 알았지?’

난 집으로 향하는 택시 속에서 그 남자의 치켜 뜬 눈동자가 계속 눈 앞을 어른 거리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사람들의 얘기를 그저 낭설로만 믿을 수는 없지만, 죽음을 앞두고 눈을 감지 못한다는 사실은 그 가슴속에 응어리진 것이 있음이라는 지적을 무심코 흘려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부병리학이란 거창한 내 전공과는 다르게 난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서 초 현실적인 징후라는 것에는 여자의 몸이면서도 누구보다 무감동하게 지나쳐 온 사람중의 하나라고 자부해 왔다. 인간이기에 가위에 눌리거나, 낮에 부검을 했던 시신이 아무런 말도 없이 내 침대 옆에 서 있는 꿈 같은 것을 일종의 노이로제나 스트레스성 직업 질환의 하나로 단순히 치부하며 살아 온 나로서는 생생한 사고 상태에서 조차 시신의 형태가 정지 화면으로 나에게 무언가를 주지하는 것을 무심코 흘려 버리질 못했다.



‘아……늦었다.’

다시금 반복되는 삶의 굴레들……지난 밤의 어수선한 일정들 때문에 잠을 설쳤던 내가 눈을 떴을 때는 생활이, 패턴이 여지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난 불안한 차의 엔진 소리에 마음 쓸 겨를도 없이, 차량의 홍수로 터져 나가는 도심 속으로 돌진 하고 있었고, 다시 예전의 그 자리로 돌아오고 있음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우리 웬수양, 출근이 늦네?’

기자가 붙여준 웬디란 이쁜 별칭도 있구만 꼭 웬수로 바꾸어 부르는 고박 이었다.

‘저 별명…웬디 거든요?’

‘신박께서 병중 이신데, 어시스트가 이렇게나 천하태평 이시니, 그럴 밖에…..’

‘저, 일 열씨미 하거던요?’

‘쌍 시옷 날라 댕기는 거 봐라 말이야…..요즘 젊은 사람들은 욕조차 바꿔 부르니…..쯧쯧…..아까부터 훤칠한 형사 양반 기둘리고 있던데….’

‘고박사님, 기둘리는 거 표준어 아니거든요? 기둘리다, 지둘리다 모두 인터넷 방언 인 거 아시려나 모르겠네요?’

항상 내 뒤 꼭지에 뭐라도 붙은 것 마냥, 느글대는 고박에게 난 한 치도 지고 싶은 맘이 없었다. 교묘히 성희롱의 범주를 벗어나 인신공격에 가까운 그의 평소 발언도 나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에 일조하는 것을 난 알고 있기에…..

‘웬수양, 어여 샤워라도 해야지, 그러고 있으면서 민폐만 끼치고 있음 쓰나? …쯧쯧…그러게 담배를 끊지…..냄새에 무디어 진다니깐?’

부검이 연이어 지는데 따라 온 몸과 의복에 배어 들어오는 악취와 여름 이면 부검실로부터 꾸역꾸역 피어 올라, 온 건물을 마비시키는 시신으로부터의 역한 냄새 때문에 샤워를 자주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실정이 그렇지는 못했다. 홍일점 선배는 남자들로만 구성된 사회 속에서 무던히도 고생을 했던 기억을 전해 주기도 했지만, 난 홍이점의 자존심을 걸고, 일부러라도 일이 종료되는 시점이 아니고서는 중간에 씻으러 가는 법이 없었다.

‘신 선배가 오늘 부검 보고서, 올리기 전에 이멜로 날리라던 데…..’

‘알고 있다니깐요?’

기어이 내 목소리가 삑사리를 먹어야 고박은 내 심사가 불편해 졌음을 알고 더듬이를 내린다.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형사는 다름 아닌, 어제 밤 현장에서 대면한 그 신참 형사님이었다.

‘구면이 됐네요.’

‘그러게요.’

나의 시큰둥한 인사로 인해 서로에게 불편한 타이밍이 잦아 들었다.

‘브리핑 때문에 이렇게나 일찍 오셨나요?’

‘아뇨, 그게 아니고……막판에 할머님이 포기하시는 바람에 부검이 어그러져서….근데, 저한테 뭐 화난 거 있으세요?’

난 그나마 홍일점 선배의 섬세함을 이어받아 거기에 덧붙여 부드럽기까지 한 홍이점 이라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 스스로를 PR해 왔는데, 그 사실이 조금은 쑥스러워지는 장면이었다.

‘잠을 설쳐서 그랬던가 보네요. 제 말투가 쫌 그런 경향이 있어요. 신경이 날카로워 지면 더 그렇죠. 그런데, 누가 반대 했죠?’

‘그거야, 잘 아시잖아요? 저야 뭐 그냥 그런가 부다 하는 입장이고….’

그는 더 이상의 대화가 어렵다는 표정으로 누런 서류 봉투를 내 밀었다.

‘이건 뭐죠?’

‘사망자의 유품 중에서 다이어리 이고요, 혹시 참고가 될까 해서, 현장 사진 카피본도 CD에 담아 가지고 왔습니다.’

‘이걸 제가 받아서는 안될 거 같은데….CD로 구워 오시느라 수고는 하셨는데…..’

‘아, 아닙니다. 저도 경험이 일천하지만, 나름대로의 감도 있고 해서….그냥 보시라고요. 시신은 어제 밤에 만나신 그 어머님이 인계 하셨구요, 유품이랑 뭐 그런 것들은 모두 화장한다고 하시더라고 요. 다이어리는 몇 장 되지도 않아서 원본 말고, 사진으로 찍은 복사본을 가져 왔으니까 그냥 보시고 버리셔도 됩니다. 범행 증거물도 아니고 해서…..’

‘근데, 좀 당황스럽네요. 제가 이걸 받아야 되는 이유가 무언지……’

‘모두다 별 거 아니라고 툴툴 접긴 했는데, 사망한 분의 뜬 눈이 자꾸 밟혀서…..뭔가 있을 수 있는 근거는 그게 다 일 것 같아서요. 급한 것도 아니고, 시간 나시면…..이제 그만 가 볼 랍니다. 바쁘신데 제가 너무 시간을 뺏은 거 같아서…..그럼…..’

그렇게 총총 걸음으로 사라지는 그 형사님에게 내 손에 들려진 그 봉투를 다시 돌려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면서도 난 그 자리에서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배웅하는 것처럼 바라다 보고만 있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보답인 것처럼 말이다. 그건 배려도, 선심도 아닌, 나만이 행할 수 있는 사소한 부드러움이란 자가당착에 빠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제 3 부 : 다리 위에서의 풍광-

‘나도 그 목소리 걸걸한 예쁜 여가수처럼 머리나 빡빡 밀어 버릴까?’

‘왜? 백구치고 참기름까지 바르시지?’

난 일과를 마치고 약속 시간에 쫓겨 항상 반쯤 젖은 머리로 튀어 나오는 나 자신이 싫어서 해 본 말이었다. 옷에 배어드는 냄새보다 더욱 황망스러운 것은 머리카락 이었기 때문 이었다.

‘아서라. 두상이나 이뻐야 깎아 놔도 보람 있지….’

‘난 자기가 얘기한 땜통도 없는데 뭐.’

‘보이는 털 말고 안 보이는 털이나 신경 쓰시죠, 네? 마님? 남들 다 내놓고 다니는 머리털, 박박 밀면 그게 비정상 이고요, 남들 다 가리고 고개 숙인 털, 옷 사이로 삐지고 나오는 거이, 비정상 인 거 아실랑가 모르겠네, 나 원 참…..’

‘그냥 해 본 소리 가지고 역정은?’

‘안 그러게 됐냐? 그 나이에 멀쩡한 머리카락 홀랑 백구치고, 제 정신이라고 할 사람들 있겠나 말이야. 그것도 여자가……’

‘자기 그럴 때 보면 열나 보수적인 거 아니? 머리만 밀면 오만 놈들 다 한입처럼 비구니로 취직 시키고, 머리카락만 자랐는데도, 인물 괜찮네 하며, 턱턱 말 까는 종자들……여자에게 머리카락이 무슨 액세서리니?’

‘아니, 내 말은 그냥 사람들 중론이 그렇다 그거지……자기가 나서서 밀겠다는데, 누가 말려? 잘려진 머리카락만 서럽다 그거지 뭐…..별거 이쓰까?’

항상 그 와의 토론은 진지함이 지나쳐 우스개로 빠지고 결국 실없는 주제가 되고 만다.

‘아닌 밤중에 웬 까까 머리 타령? 오늘 뭔 일 있었니? 누가 뭐라 그래?’

‘아니, 그냥…..항상 시간에 쫓겨서 나오다 보니, 내 꼴이 하도 기가 막혀서…..보면 모르니? 이게 어디 남친 만나러 나오는 머리 꼬라지니? 남친 만나고 나서 숨 돌리러 나오는 폼이지….’

난 그를 만나러 나오면서 그나마 생선 비린내나 없애려고 으깬 양파로 손을 씻는다는 재래 시장 아주머니의 푸념은 아닐지라도, 항상 몸을 씻고 퇴근하려고 애써 온 자신이 한심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식전 댓바람부터 머리가 반쯤 젖은 채로 지나가는 나를 쳐다보는 남자들의 느글거리는 시선은 그렇다 쳐도, 아니, 티를 내도 저렇게 드러내나 하는 표정으로 혀를 차는 같은 여자끼리의 시선 교환이 부아를 지르기에 하는 말이기도 했다.

‘뭔 일 있니? 누가 널더러 구리다고 하디?’

그는 별 거 아니라고 나를 다독거렸지만, 정말 속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마음이 산란 해서 인지, 마지막 부검 때, 늑골을 절단하면서 손에 끼었던 장갑이 찢어지는 일 때문에도 이유가 있긴 했다. 죽은 사람의 의문을 해소해 주기 위한 마지막 배려여야 한다는 심정도 어디 간 채, 그 사람으로부터 튀어 흐른 피가 내 혈관을 들쑤시고 들어 올 수 있다는 멍청한 불쾌감은 앞 뒤가 도저히 맞질 않았지만 말이다.

한마디로 그건 찝찝함 이었다. 물에 빠진 사람의 개나리 봇짐은 맨 손으로 건져 주면서도, 정작 물에 빠진 사람에게는 난 손에 사람 흔적 닿는 거이 싫어서 라며, 기어이 내 손이 아니라, 막대기를 뻗어 잡으라고 하는 것처럼…….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의 사고를 산란케 했던 것은 일과 전, 그 신참 형사님이 두고 갔던 물건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그와 헤어지고 집에 들어서기 까지, 그 물건에 대한 얘기를 화제로 꺼내지는 않았다.

‘어휴, 또 시작이야…..’

집안은 영락없이 내가 어지르고 튀어나간 상황에서 한치도 틀림이 없이, 그 자리에 얼어 붙어 있었다.

‘내일부터는 뭘 처먹지도 말고, 옷도 입질 말아야지…..누가 본다고 옷은 꾸역꾸역 입고 있다가, 이렇게나 정신 산만하게 던져 내놓는지, 내 참……’

난 또다시 정돈 속의 순서라는 마법에 걸려 집안을 치우기 시작했다. 밤이 깊어서야 난 일을 끝낼 수 있었고, 조용히 자리에 앉아, 아무런 생각 없이, 여느 때처럼 건강에 지독하게 안 좋다는 심야 커피를 들이켰다.

‘이 분도 정신이 꽤나 왔다 갔다네?’

그 신참 형사는 다이어리를 복사해서 CD에 넣어 오긴 한 것 같은데, 그 누런 봉투 안에는 복사를 위해 다이어리에서 직접 찢은 듯한 원본도 함께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아마도 복사를 위해 다이어리에서 찢었다가 무심결에 넣어 둔 것 같았다. 난 CD를 손에 들고, 잠시 핀셋을 가져 와야 한다는 생각에 멈칫하고 있었지만, 이내 그런 버릇이 직업병 이려니 하면서 그만 두고 말았다. 다이어리의 원본임을 안 이상, 나의 본능적인 태도는 지문을 남겨서는 안 된다는 것에 매달렸을 테니까.

‘남자 분인....데.... 글씨 차암... 곱다.’

다이어리에는 깨알 같지만, 참한 필체의 글씨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난 흥미를 느꼈음 인지, 그것을 들고 책상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 이유는 확대경이 달린 스탠드 때문이었다. 백만원 이상을 호가 하는 일제 제품도 아닌 평범한 제품 이었고, 노안은 아니었어도, 작은 글씨나 흠집 등을 살피기에는 안성맞춤인 탓에 자주 애용하는 물건 이기도 했다. 다이어리의 원본은 별다른 내용이 적혀 있지는 않았다. 단지 내 관심을 끈 것은 두 가지 였는데, 분명히 본인이 손으로 적은 것 같은 페이지 번호는 일련 순이긴 했지만, 그 종이의 원래 색이 어쩐지 앞 뒤가 맞질 않는 듯 해서 였다.

난 컴퓨터를 켜고, 상호가 인쇄 되어 있는 다이어리 회사의 웹사이트로 들어가고 있었다. 제품에 대한 소개와 더불어 몇 개를 뒤져 가던 순간, 내가 손에 들고 있는 원본과 동일한 디자인의 다이어리를 발견하게 되었는데, 내가 예상하고 있던 것과 대충은 맞아 떨어지는 특징이 드러나고 있었다. 대개의 다이어리의 내장 지는 일정한 기간, 즉 월이나 주말, 혹은 계절 별로 색을 달리 하기 때문에 이렇듯 인위적으로 총 천연색을 그것도 비패턴 적으로 한 장씩 다르게 생산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그 남자 분은 어떤 내용들을 썼다가 찢고서 자기 나름의 일련 번호를 붙였다는 건데, 그래서 종이의 색이 마구잡이로 뒤엉켜 있었던 거고……’

두 번째 의문은 원본 중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페이지가 그것 이었다. 다른 페이지도 많았을 터인데, 어째서 그걸 보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무엇인가 적혀 있는 내용을 살펴 봐야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인지, 의문은 뒤로 하고서 난 그 다이어리의 기록된 내용에 집중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직업이 쫌 궁금해 지네. 그때 그냥 들어 둘걸….’

내용을 읽어 가면 갈수록 그런 생각이 들고 있었다. 전번 같은 것도 없고, 낙서도 아닌데다가, 일상에서 잊기 쉬운 구좌번호, 아뒤, 비번 같은 것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자신의 심상을 적어 놓은 메모나 단순 일기장으로 보기에도 내용이 퍽이나 거리가 있었다. 앞뒤의 연결도 없이, 이를테면 작가가 글을 쓰기 위해 아무렇게나 찍찍 갈겨 놓은 모티브 같다는 느낌이 아주 강했다.

본인 만이 알아 볼 수 있고, 연결 지어 종국에는 하나의 완성 체를 만들 수 있는 고리이자, 버팀목 같은 타입의 글이었다. 날짜나 기억될 만한 지명도 안 나오니 그 내용의 현실성조차 의심이 되는 사이, 나는 밀려 오는 피로 감으로 더 이상 버티지도 못하고 침대로 기절하듯이 쓰러져 잠이 들고 말았다.

‘......왜...왜...왜 이렇게 안 써 지는 거야?’

난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 났다.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다시 자리에 누울 수 밖에 없었지만, 난 방금 전 꿈 속에서 본 나의 행동이 심상치 않았음을 느낀 탓이기도 했다.

‘어디 보자………’

난 다시 확대경을 켜고, 부시시한 머리를 뒤로 묶는 동작과 함께 맘이 급해지고 있었다.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던 그 페이지…..그건 아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이었다. 난 그제서야 내가 방금 전 꿈을 꾼 것이 아니라, 어떤 강한 암시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확신을 갖기 시작했다.

꿈 속의 나는 샤프심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촉을 꽉꽉 눌러가며, 도화지에 무언가를 계속 써 나가는 모습 이었고, 내가 지금 손에 들고 확대경에 비추고 있는 텅 빈 페이지의 표면에도 꿈과 동일한 방법으로 어떤 내용을 깨알같이 적어 놓은 것이 분명했다. 난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둘째 손가락으로 인중을 비비적 대는 나의 버릇….그건 무언가 안 풀리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 튀어 나오는 흔한 버릇 중의 하나였다.

‘아, 싸구려는 이래서 문제야….저질 렌즈…..’

확대의 정도에도 차이가 있었을 뿐더러, 어느 부위는 렌즈 두께의 왜곡이 심해 퍼져 보이기까지 해서 그 글씨가 무엇이었는지 내 찌질 대는 확대경으로는 확인한다는 자체가 무리가 있었기 때문 이었다. 그 안에는 분명 숫자처럼 보이는 부분도 있었고, 확실 하지는 않지만, 이 메일 아뒤에 쓰이는 골뱅이 표시도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그 남자의 생전 인터넷 흔적을 따라잡을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서 분석실로 들고 가?’

그러나, 그건 안될 말이었다. 개인적으로 부탁한다 해도 나와의 관련성은 고사하고, 이미 고인이 되어, 유품도 태워졌다는 사람의 사적인 물건이란 소문이 나고 나면, 빼도 박도 못한 채, 징계를 먹을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지이이이익…..지이이이익….’

이른 새벽에 전화를 넣을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들여 다 본 핸드폰 액정에는 신박의 이름이 떠 있었다.

‘….이시이….’

난 신박을 가리켜 2차 대전시 악명 높았던 731 부대의 이시이 부대장 이름을 전번에 넣어 놓고 있었다. 신박은 내가 병아리 시절, 팀원들 간의 회식중, 731부대에 대한 격론이 벌어졌을 때, 그들의 그런 천인공노할 범죄행위가 이제는 의술이란 합법화의 테두리 안에서 정제되고 규제화 되어 생체에서 생명만이 떠난 시신으로 주체가 바뀌었을 따름이지, 그들이 남긴 해부학적, 생체병리학적 결과물들이 범죄행위임에는 분명하다해도 그 전부를 의학적 견지에서나마 과소 평가 하거나 도외시 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여 나의 뚜껑을 빡시게 열어 버렸던 때부터 였다. 난 전화를 받을까 말까 몇 초간 망설였다.

‘딸깍…..여보세요….박사님 이세요? 이른 시각에 어쩐 일로….어제 낮에 보고서는 이멜로 보내 드렸는데, 받으셨죠?’

난 용건을 간단히 하기 위해서 일부러 다다다 말을 붙여서 해버렸다.

‘응…뭐 어려운 점은 없고?’

‘안 계시니까 마냥 힘들죠, 뭐….’

‘허허……힘들긴, 이제 혼자서 자리 꿰 찰 때도 됐구만….나 한 이틀 더 쉬어야 할까 봐.’

‘네. 그러세요. 참, 박사님, 여쭈어 볼 게 있는데….’

‘얘기해 봐.’

‘저, 맨 종이에 필압으로 생긴 자국의 글씨를 어떻게 확인 할 수 있을까요?’

‘뭐 그거야 간단하지….지금 머리 속으로 연필 곱게 갈아서 종이 위에 칠해 보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야. 그거야 영화 속에서 된장들이나 하는 짓거리고…..그래도 전문가라고 하면….. 난 먹을 추천 하고 싶네.’

‘네? 먹이라뇨? 지문 채취용 분말을 사용하는 게 아니고요?’

‘응. 먹이 만들어 지는 원리 정도는 알고 있지?’

‘네 그을음이죠.’

‘그래 단순하면서도 먹을 가져 다 어디에 쓸까 생각하면 답이 없지? 자네가 열의가 있다면, 직접 먹가루를 채취해 보는 거야, 등유를 사다가 심지를 만들든가, 아니면, 소나무 가지를 태우며, 사기 그릇을 이용해서 직접 그을음을 채취 하는 거지. 입자가 아주 고와…..소나무 가지를 태워 만든 먹은 특별히 송연묵이라 하네. 비싸지. 좋은 제품은 때려 보면 맑은 소리도 나고…..먹은 아교와 성분상 탄소가 결합되어 있어서 물로 갈아야 입자가 곱게 나오니 고형 상태에서 칼로 갈아내면 크레용 빠갠 것 보다 못한 입자가 형성되어서 필요성이 전무해 지고…그러니 자네가 직접 채취해 보라는 것이야. 아교와 섞기 전에 화심으로부터 채취된 그을음은 탄소 결정체 일테니 그걸 긁어 보면 정말 고운 입자를 얻을 수 있다는 결론이 되질 않겠나?’

‘그런데, 왜 그렇게 수고를 해야 하죠?’

‘자네, 수사 때문에 그런 질문을 하나?’

‘뭐 이런 저런 관심 때문에……’

‘그렇다면야……일단은 그 증거물의 글자 확인을 하기 전에 지문감식 팀에게 보내고 레이저 지문 감식을 받고서 시작해야 해. 왜냐하면 먹가루는 유류성분에서 추출되었기 때문에 건조한 종이의 표면, 그것도 필압으로 생긴 골에 붙으면 좀처럼 떨어지기 어렵지. 그걸 털어내려고 애쓰다 보면 필압에 의한 굴곡이 망실 되기도 하고, 결국 글자의 내용을 확인하기 어렵질 않겠나? 게다가 필압을 보존해야 되니, 평소처럼 닌히드린을 사용할 수도 없을 게고…..뭐 대충 그렇지….아, 그리고 노파심에서 한마디 더 얹자면, 그 가루를 털어내려고 입김을 불지 말 것. 자네 날숨에 포함되어 있는 수분 함유량이며, 튀어 나가는 침의 파편이 그 미세한 필압의 굴곡에 얼마나 치명타를 줄지 잘 알겠지?…….’

난 신박을 상사로 모시고 있으면서도 그의 지론에 손을 언제나 들어 주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의 높은 식견과 열의에는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항상 생각해 왔다. 그의 얘기대로 할 수 없이, 레이저 지문 분석을 의뢰 해야 하지만, 난 그것은 뛰어 넘기로 했다. 내가 알고 싶은 것은 지문이 아니라, 그 안에 적혀 있으되, 드러나지 않은 내용이 문제 였으니 말이다. 난 되도록 빠른 시간 안에 아교와 혼합되지 않은 순수한 성분의 먹가루를 채취할 수 있는 방도를 알아봐 달라고 그에게 톡을 넣었다. 그가 메일을 읽었다고 생각한 그 다음 바로 전화가 날라왔다.

‘야, 아침부터 웬 톡?’

‘그러는 자기는 출근 전인데, 웬 톡 체크? 나 말고 따로 꿍쳐 놓은 애친 이라도 계시나?’

난 잠이 달아난 새벽부터 출근 준비 태세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던 참이었다. 항상 쫓겨야만 했던 아침 시간에 이렇듯 여유를 부릴 수도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출근 전에 집안을 정리하여 놓음으로 인해서, 퇴근하고 맞이 하는 방안의 풍경이 마치 호텔방을 처음 열고 들어서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상상 되는 것만으로도 흐뭇했다.

‘그럴 일이 있어. 자기는 미술 관련 일을 하니까 이런 재료 구하기가 나보다 수월하지 싶어서….’

‘별걸 다 시켜요. 나도 큐레이터 보조 랍시고 목구녕에 풀칠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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