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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3 01:16 560회 0건

143. 너는 영원이 아빠






한수정은 침착하게 말을 또박또박 시작했다.



"미안해. 너 오는데, 공항에 나가지도 못했네."
"아냐. 회의중이었다면서 어떻게 나와? 네가 안 나왔어도 아무 일 없잖아."

"그게 문제야. 너는 내가 없어도 뭐든 잘 한다고 생각하거든. 토론토에 와서도 여전하네. 나라는 여자 없어도 너한테는 아무 문제 없지? 네 인생 어딘가에 내가 필요한 구석이 있기는 해?"

"너 지금 약간 오바하는 것 아니니? 내가 한 것이라고는 공항에서 여기까지 택시타고 여기 온 것이 다야. 수정이 너도 여기서 나 없이 잘 하고 있잖아?"

"나? 나는 여기서 혼자가 아니야. 나한테 네가 없으면, 은희언니라도 있거든. 아무도 없이 나 혼자 어떻게 해내겠어? 나 혼자는 안하고 또 못해."



이야기를 시작하는 데 벌써 한수정이 소름끼칠 정도로 무서워진다. 지금 이 여자는 내가 알던 한수정이 아니다. 그녀는 작년 봄에 서울에 왔을 때와 비교해도, 변해도 너무 변했다.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고, 아마도 그 일을 겪으면서 저렇게 변한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일이었을까?



"네가 온다고 해서, 내가 공항에 간다면, 무엇 때문에 나가겠니? 혹시라도 네가 뭐를 잘 못 할까봐 도와주러 가겠니? 그게 아니잖아? 네가 그 먼 길을 왔으니까, 내가 한시 바삐 너를 보고 싶고, 또 너한테 빨리 나를 보여주러 나가는 거지. 이렇게 보고 싶고, 보여주고 싶고, 만나고 싶어 하는 것도 사람 사는 세상에 있는 정이고, 사랑이 아니겠어?"

"그래. 네 말이 맞아."



수정이는 마시던 와인잔을 마저 비운다. 나는 그 잔을 다시 채웠다. 나는 수정이의 잔소리가 이것으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은 오해였다. 수정이는 계속해서 말을 잇는다.



"너 지혜랑 잤니? 기숙이 말로는 아니라고 하던데."
"내가 여고생이랑 자야할 정도로 여자에 미친 놈으로 보여?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지?"

"너네 둘이 호텔 방에 있으면 어떡해? 내가 서울에 가면 호텔에서 지낸 적 있어? 지난 번에 왔을 때도 그래. 내가 살던 집이 비어있었는데, 웬 호텔이냐고. 이게 말이 돼? 호텔에서 자는 것을 피할 수 없다면 몰라도, 지금 우리 사는 집이 엄청 넓다고 너한테 말 했거든? 나는 네 침대에서 자는데, 너는 내 침대에서 자면 안되는 이유라도 있어? 회장님이라서 그러나?"
"그거는 아까 공항에서 택시 타고 그냥 가면서 .."

"말도 안되는 거짓말만 하고 말이야. 너는 이 해밀턴 호텔에 벌써 서울에서 인터넷으로 예약을 했다며? 네가 일주일 동안 있을 곳을 나한테 알아보라고 말한 적이 있니? 네가 벌써 이 호텔에 예약을 해놓고, 나중에 나한테 결과를 통보했지. 아까 내가 공항에 갔었더라면, 네가 여기로 오도록 그냥 두지는 않았을거야. 그 자리에서 예약을 취소하고 내 집으로 데려갔겠지."

"맞아. 미안해. 호텔은 내 생각이 짧았었네. 그럼 지금이라도 방 빼서 옮겨?"

"됐어. 이제와서 뭘 옮기냐? 벌써 일이 이 지경으로 돼버렸는데, 그래서 뭘 어쩌겠다고 그래? 코미디도 아니고 .."
"걱정 마. 지혜랑은 호텔 방을 따로 쓰니까, 별 일 없을거야."

"웃겨. 기껏 한다는 소리가 그거 밖에 안 되니? 침대 두 개가 20미터도 안 떨어져 있던데?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문을 두 개만 열고 통과하면 되거든요. 더블베드에 선을 긋고, 넘어오지 말고, 그냥 손만 잡고 잤다는 개소리랑 뭐가 다르니?"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한수정이 또 와인을 마신다. 여기서 끝낸다는 말일까? 아니면 다른 주제로 바꿔서 계속할까? 그동안 나에게 쌓여있는 감정들이 많은가보다. 쌓여있는 해묵은 감정은 쓸데없이 편견과 오해만 생산해낼 것이다. 차라리 이렇게라도 해서 툭툭 털어내는 것이 좋은 일 아닌가?



"피곤하지? 올라가서 잘래?"
"아니야. 괜찮아."

"괜찮긴? 13시간이나 차이가 나는데."
"난 괜찮으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마저 해."




한수정은 잔을 비웠다. 테이블 위로 모은 그녀의 두 손이 약간 떨리는 것 같다. 이번에는 더 심각한 주제인가? 도대체 나는 왜 이렇게 한수정에게 바보같이 굻었을까? 한수정이 얼마나 답답했을까? 내가 생각해도, 나는 참 한심하다.



"이런 일을 숨겨거 뭐하겠어? 그냥 솔직하게 말한다?"
"......"

"작년 봄에 내가 서울에서 여기로 돌아오니까, 은희언니는 나 없는 사이에 멕시코에 갔다왔더라."
"멕시코에는 왜 갔대? 혹시 휴가였나?"

"나도 여행 갔었던 줄 알았는데, 사실은 임신중절 수술 받으러 간거였대."
"임신 중절? 그럼 낙태? 그것 때문에 왜 멕시코에까지 가서?"

"캐나다에서는 도저히 못하겠어서 그랬대."
"그럼 그 때 네가 나한테 말한 것이 사실이었니?"

"언니는 자기가 임신한 것이 사실인 것을 확인했고, 처음에는 그 아기를 낳으려고 생각했었대. 그런데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니까, 도저히 아기를 낳을 수가 없었대. 아빠도 그렇고, 직장도 그렇고 .."

"저런. .."

"그런데 태현이 너도 생각해봐. 수술을 4월 초에 받았다는데, 그 때가 벌써 임신 3개월이 지났을 때였거든. 그러면 수정해서 착상이 된 것은 1월초라는 말 아니니?"
"맞아. 그렇네."

"그런데, 그때는 태현이 네가 여기 있었을때야. 어떻게 생각해?"
"뭐가? 맞아. 작년 1월 초에는 내가 여기 있었어. 맞잖아?"

"너는 생각을 못하니? 아니면 안하니? 그 때 태현이 너는 여기 와 있었고, 나는 의식을 잃고 누워있었다고. 그 때 언니가 만나는 남자는 없었어. 어디가서 성폭행을 당했을 리도 없고."

"그래. 맞아."
"내 말이 무슨 말인지 몰라?"

"글쎄?"
"글쎄라고? 진짜 모르니? 아니면 모르는 척 하는 거니? 그 말을 꼭 내 입으로 하라고?"

"해봐. 뭔데 그래?"
"야! 이 바보야! 그니까 태현이 네가 언니랑 잤냐고. 김태현이 그 아기 아빠 맞냐고. 맞아? 안맞아?"

"맞아."
"뭐야? 너 정말 .."

"그러니까 은희누나가 지금 야근을 핑계로 여기 안오는 거지?"
"그래. 이 나쁜 놈아."




한수경은 고개를 숙이고, 한수경의 어깨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녀는 조용히 흐느끼고 있다.



"너는 진짜 나쁜 놈이고, 야만적인 동물이야. 너만 즐기면 된다는 거야?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너는 그 생명을 이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하게 하니? 그렇게 무책임해도 되는 거니? 아니면 콘돔 살 돈이 없었니? 네가 그렇게 잘났어? 너는 라텍스를 뒤집어쓰면 안될 정도로 고귀하시니? 아니면 에스트로겐, 프로게스테론, 루트로핀으로 가임기 날짜 계산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실패한 이유가 뭐야? 언니가 주기를 속여서 말한 거니? 도대체 정신줄이 어디 있는줄 알기는 알아?"
"....."

"내가 이번에 왜 언니랑 살림을 합쳤는지 알아? 언니가 그 일로 우울증에 걸려서 자살할 지도 모르겠더라고. 내가 작년에 서울에서 너한테 언질을 줬으면, 여름에 방학때라도 잠시 왔다 갔어야 하는 것 아냐? 지혜 대학에 보내는 것은 중요하고, 네가 저질렀을 지도 모르는 이 사건을 와서 보고, 뭔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은 아예 안한거니? 이 외계인아. 지구인은 그렇게 안하거든요."
"......"

"솔직한 내 심정은 이번에도 너를 여기 오지 말라고 하고 싶었어. 그런데 언니가 너무 불쌍한 걸 어떡해? 오려면 너 혼자 오든가. 지혜는 왜 달고 오는데? 걔가 네 꼬리니? 너네가 부부야?"
"......"

"솔직히 말하면, 지금 내 눈에 너는 남자로 안보여. 이번에도 와서 나랑 언니랑 다 건드리고 가고 싶지? 지혜도 언제까지 저렇게 두겠어? 대학에 들어가면, 여고생이 아니니까 바로 딸거잖아? 너는 인간이라면, 엄청 교활한 인간이고, 남자라면, 아주 비열한 남자야. 너는 그냥 미친 수컷이야. 이 여자, 저 여자 몸에 들어가서 싸고 나올 생각만 하는, 나쁜 수컷이라고. 이 단세포야."
"......"

"내일은 아침 일찍 내가 지혜를 데리고 멀리 갈거야. 너는 언니 불러내서 잘 위로하고, 용서를 빌어. 그 일이 있고나서 지금까지 형편없이 망가진 은희언니를 다독거려서 추스리게 할 수 있는 사람은 70억 인류 중에 너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잊지마. 너 이번에 그 일 성공하지 못하면, 참회고 속죄고 다 미친 지랄이야. 너도 태어나지 못한 그 아기의 뒤를 따라가. 하루라도 빨리 저 세상에 가서, 그 아기의 아빠 노릇이나 착실하게 해. 이 세상에 더 있어봤자, 앞으로 저런 아기들이 너 때문에 얼마나 많이 생기겠어?"
"....."

"언니가 그 아기의 이름을 영원이라고 지었었대. 태어날 아기가 남자일지 여자일지를 몰라서 양성용으로 지은 이름이래. 너는 영원이 아빠야. 바보같은 엄마 아빠 때문에 영원이는 허수의 세계에서 실수의 세계로 넘어오지도 못했어. 어쩌면 이 더러운 세상에 오지 않은 것이 깨끗한 영원이에게는 잘 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수정은 벌떡 일어나더니 밖으로 나가버렸다. 나는 입이 열개가 아니라 백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한수정이 하는 말에는 틀린 말이 한 마디도 없기 때문이다. 이번 사건은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다 내 잘못이다.

나도 계산을 하고 호텔 밖으로 나갔다. 한수정은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서서 흐느끼고 있다. 나는 한수정의 뒤에 서 있었다. 아무리 생각을 해도 뭐라고 알을 해야 할 지 떠오르지 않는다. 미안하다는 말로 판을 뒤엎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을 했다.



"수정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미안해? 잘못했다고? 그 말 참 좋은 말이지. 무슨 잘못을 했는데?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은희누나가 영원이를 임신하게 한 것은 내 잘못이야."
"네가 한 잘못이라는 것이 겨우 그거니? 내가 지금 그 사건 때문에 열받아서 이러는 줄 알아?"

"그럼 또 있어?"
"그것은 일차 잘못이고, 그 잘못 때문에 생긴 이차, 삼차 잘못들은 없니? 생각없이 경솔하게 행동하는 바람에, 태어나지 못할 영원이를 임신하게 한 사실, 언니가 그로 인한 죄의식 때문에 아직도 마음 고생을 하는 것이나, 너는 내가 말했을 그 때 당장이나, 아니면 여름에도 바쁘다고 와보지 못한 것도 그렇고 .."

"그래. .. 다 내 잘못이야."
"네 잘못, 언니 잘못이야. 그건 좋아. 그래서 뭐 어쩔건데?"

"......"
"나 간다. 내일 아침 일찍 전화하고, 지혜 데리러 온다."



한수정은 집으로 가겠다고 했다. 한수정은 최은희가 집에 와 있을 것이라면서 최은희에게 전화를 했다. 한참 후에 최은희가 차를 갖고 와서 한수정을 태웠다. 한수정은 손에 쥐고 있는 티슈로 눈물을 닦는다. 그녀들은 나에게 손을 흔들지 않고 그냥 어둠 속으로 가버렸다. 나는 최은희의 차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나도 호텔 방으로 돌아와서 샤워를 하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지혜에게 가서 보니까, 지혜는 열심히 자고 있다. 우리는 비행기에서 잠을 너무 조금 잤다. 그래서 지혜는 엄청 피곤했나 보다. 내 쪽으로 건너와서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도대체 잠이 오지 않는다. 내 머리 속에서는 여러 가지 지저분한 생각들이 한꺼번에 들끓는다. 가슴도 답답하다.

한참을 누워 있는데, 욕실에서 물소리가 나더니, 지혜가 내 이불 속으로 들어온다.



"왜 안자고 왔어?"
"오빠. 나 엄청 무서워. 안아줄래."



나는 지혜에게 팔벼개를 베게 해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지혜는 바보같이 내 품으로 파고든다. 나는 지혜의 몸을 꼬옥 안았다. 지혜의 등을 쓰다듬으니까, 내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고, 머리 속도 정리가 되는 느낌이다.



"수정언니는 갔어?"
"어."


지혜가 얼굴을 들고 내 입술에 키스한다. 이제 잠이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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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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