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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남긴 흔적 - 단편47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3 01:19 446회 0건

원래는 단편으로 짧게 쓰려고 했는데, 너무 길어졌죠?
앞으로는 생략할 것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속도를 내겠습니다. ..



앞 글에서

"<소태>는 짠 것을 말할 때 써야지, 커피가 쓴 것을 소태로 표현할 수 없다."

고 가르쳐주신 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모르는 것들도 많고, 또 글을 밤 늦게 쓰다보면 이런 것 저런 것 모두 엉망이 됩니다.
제가 실수하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은 언제든지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으니까,
굳이 귀찮게 쪽지를 사용하시지 않고, 댓글에 바로 적으셔도 황송합니다.


욕플이라도 좋으니 제발 써주시길 .. ㅋㅋ


- Ja"dore -



=*=*=*=*=*=*=*=*=*=*=*=*





47. 방황은 바람 때문에?





나는 창문을 열고 환기를 시켰다. 얼룩진 침대 시트를 갈고, 청소도 했다. 일주일간 비워둔 상태여서 치울 것이 그리 많지는 않았다. 여행에서 돌아온 짐도 풀고 세탁기도 돌렸다. 커피 메이커에 커피를 내리게 해놓고, 샤워를 했다. 드리고 나서 나는 벗은 몸으로 욕실에서 나왔다.


그런데 갑자기 소파에서 비명 소리가 난다.



"끼아악!"



김효원이다. 나는 재빨리 옷방으로 달려가서 옷을 입고 거실로 나왔다. 나도 놀랐지만, 김효원도 놀랐을 것이다.




나는 효원이에게 커피를 갖다 주었다.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얼굴은 완전히 빨갛다. 나는 모르는 척 하고 김효원의 오른쪽으로 앉았다. 몸을 틀어서 김효원을 향하게 했다.




"놀랐지? 미안해."
"아뇨. 내가 그냥 들어와서 .."

"언제 왔어?"
"밑에서 전화를 해도 받지 않으셔서,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하고 .."

"내가 어린애야? 생길 일이 뭐가 있어?
그럼 효원이도 내 비밀번호를 알고 있니?"

"어제 강대리님이 가르쳐줘서 내가 문을 열었거든요."
"괜찮은거지?"

"나는 아무렇지도 않아요."





김효원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잔을 테이블로 내려놓는다. 김효원이 오늘도 예쁘게 차려 입었다. 타이트한 얇은 하얀 색의 라운드 니트와 짧은 청치마. 깔끔하고 시원스런 몸매가 돋보인다.

아무리 직장 상사의 집이라고 해도 나는 분명 남자이다. 내 집에 이렇게 혼자 와서 앉아있는 김효원은 지금 나의 극기력을 테스트하는 것일까? 아니면 김효원은 나를 남자로 의식하지 않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에 대한 믿음이 크다는 말이겠지. 그런데도 나는 마음에 드는 여자를 보면 기어코 정복을 해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수컷인가?

마치 바람처럼 김효원은 조용한 내 가슴을 흔들기 시작하는 것 같다. 나는 지금은 거부하지만, 이 거부가 얼마나 오래 갈 지는 의문이다. 언젠가는 나 스스로 포기할 것 같다. 저 여린 바람을 이길 재주가 내게는 없다.



"혼자 왔니?"
"강대리님은 자다 깨다 하면서 계속 잠을 설쳐서 일어나지 못하겠대요."

"그럼 내일 같이 만날걸 그랬나?"
"그러게요."

"먹고 싶은 것은 있어?"
"아이. 참. 내가 먹고 싶은 것이 있어서 온 줄 아세요?"

"배달비 달라고 했잖아? 같이 저녁 먹자는 말 아니었어?"
"그렇기는 한데, 나는 그냥 오빠랑 .."




김효원은 시작한 말을 끝까지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다.




나는 고개를 돌려 김효원을 쳐다보았다. 지금 당장 김효원의 손을 잡든지 아니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든다. 김효원의 가슴이 내 가슴에 와서 누르게 하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하다. 김효원의 빨간 입술에 키스하고 싶다. 우리에게는 이미 어느 정도의 스킨쉽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해도 무슨 일이 터지지는 않을 것 같다.

나에게 김효원의 손을 잡을 용기는 없다. 그 대신에 악수를 청하듯이 김효원을 향하여 내 오른손을 내밀면서 김효원을 불렀다. 내 목소리가 떨렸을 것 같다.



"효원아."



그녀가 나를 향하여 고개를 돌린다. 내가 내민 손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김효원은 내 손을 잡는다. 우리의 손은 내 허벅지에 왔다. 나는 내 손에 잡혀 있는 김효원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아까 회사에서 보니까 강대리 차가 지하 주차장에 있던데, 너 혹시 아는 것 있니?"
"어제 짐 가지고 간다고 집에 가서 가져왔는데, 팀장님 차로 가는 바람에 .."



김효원의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 같다. 우리가 회사 일을 얘기한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 같다. 나는 이야기를 김효원에게로 돌렸다.



"오늘은 효원이가 엄청 예쁘게 하고 오셨네?"
"화장도 안했는데, 예쁘긴 뭐가 예뻐요?"

"효원이는 화장을 꼭 해야 예쁜 것은 아니거든."
"우리 나라에서는 여자가 화장을 하는 것이 예의라고 하던데요?"

"나는 그런 것 몰라. 화장 안해도 엄청 예뻐."
"하아. .. 오빠. .."



김효원이 답답한 듯 한숨을 내쉬고 내게로 몸을 기대왔다. 나는 왼 팔로 김효원의 등을 둘렀다. 그녀는 머리를 내 어깨로 얹었다.



"오빠. 나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열 개라도 물어봐. 뭔데?"



김효원은 한동안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답답하다.



"뭔데 그래?"
"그게 .. 말하기가 쫌 .."

"괜찮아. 말 해."
"우리 지난 번에 노래방 갔던 일 기억 나요?"

"당연하지. 왜? 노래방에 또 가자고?"
"아뇨. .."

"그게 왜?"
"그 뒤로 오빠가 또 안아주기를 기다렸는데. .."

"글쎄. .. 나도 그러고 싶기는 한데. .. 그렇게 하면 안될 것 같은데?"

"왜 안돼요? 회사라서?
여기는 회사가 아니고 오빠 집인데도 안돼요?"

"그게 .. 그러니까 .. 내가 효원이를 안으면, 안는 것으로만 끝나겠어?
지금 이 정도면 안은 거나 마찬가지 아니니?"

"강대리님은 회사에서도 안아주더만. 나는 어려서 안돼요?"
"봤니?"



김효원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두르고 있는 팔에 힘을 주며 내 쪽으로 당겼다가 놓아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떨어져나가지 않고 내게 밀착해온다. 김효원의 가슴이 내 몸을 꼬옥 누른다.



"하아. .. 기억나요?"
"무슨 기억?"

"우리 키스했던. .."






김효원이 내게 잡혀있는 손을 빼낸다. 내 손을 잡고 자기 허벅지로 가져가서 만지작거린다. 그러다가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본다. 김효원의 얼굴이 내 얼굴로 다가온다. 이것이 착시 현상일까? 아니면 실제로 일어나는 일일까?

내 가슴이 요란하게 뛰고 있다. 김효원도 얼굴이 빨개진 것을 보면 마찬가지일 것 같다. 김효원의 눈이 감겼다. 김효원과 내 입술이 맞닿았다. 나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내가 조금이라도 누른다면 그녀의 입술은 터져버릴 것 같다. 이 부드러움 그리고 이 향기를 나는 그 동안 잊고 있었다.

나는 참고 있으려고 모든 노력을 모두 동원했지만 결국 실패했다. 내 혀끝이 조금 입 밖으로 나와버린 것이다. 혀 끝으로 김효원의 입술을 부드럽게 쓸면서 지나갔다. 김효원의 입술이 기다렸다는 듯이 조금 열린다.

그녀의 두 입술 사이로 내 윗입술이 밀고 들어갔다. 김효원은 내 윗입술을 빨아당긴다. 이번에는 내가 그녀의 아래 입술을 빨아당긴다. 그녀의 입이 크게 열리고 그녀의 혀가 내 입으로 들어온다. 우리의 혀는 내 입 안에서 서로 엉킨다. 머리에서는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다. 내가 이 세상에 없는 것 같다. 우리는 서로의 입술과 혀를 빨았다.



"하아앙. .. 하앙. .. 아앙. .."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떨어져서 한동안 거친 숨을 가라앉혀야 했다.



그렇지만 이런 일은 더 이상 일어나면 안된다. 지금 이사로 승진한다는 말도 있는데, 나이도 어리고, 직급도 낮은 여직원과 부적절한 사건을 일으켜서는 말이 안된다. 벌써 강대리 한 명만으로도 충분한 골치거리이다. 그녀는 그래도 입이 무거운 편이고, 회사 안과 회사 밖을 구별하는 안목도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다. 김효원과 사건이 일어나는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할 것 같다.

나는 낮에 먹은 갈비 때문인지, 당장 뭔가를 먹어야 할 정도로 배가 고픈 것은 아니다. 아까 주연이랑 열심히 한 때문인지 다행히도 텐트를 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 그렇지만 이 자리에 계속 있다가는 김효원과 사고를 칠 확률이 높아진다. 우선 어디론가 밖으로 나가야 한다.




나는 소파에서 나왔다. 여기 저기를 다니면서 전화기, 지갑, 차의 키를 챙겨서 김효원에게 갔다. 김효원은 자기 손거울을 꺼내서 얼굴을 체크하고 있다. 정말 여성스러운 모습이다.




"효원씨. 우리 이제 나가자."



효원이는 자기가 마신 커피잔을 주방에 가져다 두고 현관으로 나온다. 나는 현관에서 신을 신고 서서 기다리고, 효원이는 몸을 구부리고 하얀 운동화를 신는다. 그녀가 몸을 일으키는데 나는 내 손을 뻗어서 잡게 했다. 효원이는 내가 내민 내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일어선다. 우리의 몸이 서로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나는 위험 신호라고 생각하고 재빨리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내 가슴이 제법 요란해진다.





우리는 엘리베이터로 내려와서 내 차에 탔다. 밖은 이미 어둡다. 차 안은 김효원에게서 나는 향긋한 냄새로 가득해졌다. 나는 안전벨트를 메고 시동을 걸을 준비를 했다. 그런데 김효원은 안전벨트를 할 생각을 하지 않고, 몸을 내 쪽으로 돌려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작고 갸름한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이 꼭 만화에 나오는 여주의 모습 같다.




"효원이 어디 가고 싶은 데 있니?"
"저. .. 오빠한테 .."

"뭐?"
"오빠한테서 술 냄새가 나요. 운전은 내가 하면 안돼요?"

"와인 딱 한 잔 마셨거든. 그것도 지금부터 네 시간쯤 전에."
"그래도 불면 나올텐데 .."

"불안하니?"
"아무래도 안되겠어요. 택시 안타실거면 제가 운전할게요."




김효원이 나를 믿지 못하는지, 아니면 불안한지, 벌써 차에서 내린다. 나도 어쩔 수 없이 차에서 내려서 김효원에게 운전대를 넘겼다.



"잘됐다. 오늘은 효원이 너 가고 싶은 데로 가."
"아무데나요?"

"우리 사회의 관습에 저촉되지만 않으면 돼. 하하."
"그런 데가 어디죠? 하하."

"그건 네가 알아서 결정해. 이제부터 앞으로의 모든 일은 효원이가 알아서 해. 난 몰라."





김효원은 차를 출발시켰다. 나는 전화기를 열고 문자 메시지를 들여다보았다. 그런데 안산 영신전자의 김사장이 내일 저녁에 시간을 내달라면서 연락을 기다리겠다고 한다. 그의 이름은 부재중 전화에도 여러 개가 보인다. 나는 그에게 전화를 했다. 우리는 내일 저녁을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 하기로 하고, 내가 안산으로 가겠다고 약속을 했다.


그런데 차는 어느 새 올림픽 대로를 달리고 있다. 한강변을 따라서 잠실 쪽을 향하고 있다. 나는 김효원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어디로 가려고 이 길로 왔어?"
"일단 이 길로 주욱 가서 서울을 벗어나려고요."

"멀리 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 같은데. 어둡잖아. 무섭지 않니?"
"오빠랑 같이 가는데 뭐가 무서워요?"

"너무 멀리 가지는 말자."
"알았어요. 걱정 마세요."





그런데 김효원이 운전을 매우 조심해서 한다. 그래서 나는 안심하고 조상훈과 전화 통화를 했다. 나중에 오미현이 또 전화를 해서 유아영에게는 왜 전화를 하지 않느냐고 성화다.



"아무래도 내일 만나기 힘들 것 같아서 고민 좀 하느라고."
"왜 또?"

"저녁에 안산에 가야 하거든."
"회사일이야?"

"그럼 내가 놀러 다니겠니?"
"지금은 만나면 안돼? 시간이 안되나?"

"나 지금 서울에 없어."
"도대체 이 오빠는 홍길동도 아니고 뭐야?"

"미안해. 나도 지금 정신을 차리지 못 할 정도야.
아직 시차 적응도 잘 안돼서 밤낮 구별도 힘들어."

"오빠도 참 딱하다. 딱해."
"주중에 시간 내볼께."



오미현이 심사가 불편한지 전화를 끊어버린다. 그런데 차는 벌써 미사리를 지나고 있다. 나는 김효원에게 뭐라고 할까 하다가, 그녀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그냥 두었다. 그 대신에 CD를 넣고 음악을 재생시켰다.




김효원이 내게 물었다.



"피곤하시다면서요?"
"전혀 아닌데. 내가 언제 그랬어?"

"아까 전화 통화 하시면서 그러셨거든요."
"친구 커플이 만나자고 하는 바람에 뻥친거야."

"나 때문에요?"
"꼭 그런 것은 아니고, 아직은 누구 만나서 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서 그래."

"그러다가 왕따 되시겠어요. 하하."



나는 그들과 만나지 않더라도, 이렇게 김효원과 드라이브를 하는 것 만으로도 만족스럽다. 서늘한 초저녁의 상큼한 공기가 서울과는 다르다. 가을이라는 계절을 실감나게 한다.



갑자기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가을날"이라는 시가 떠오른다.


"......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오래도록 홀로 남아서
잠들지 않고, 글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리고 나뭇잎이 떨어져 뒹굴면
초조하게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나는 지금 한강변을 달리고 있고, 또 나는 이 여자 저 여자를 품에 안고 있다.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내가 내 고독을 이겨내지 못하여 방황하는 중이기 때문인가? 내가 이렇게 방황하는 것은 내 마음에 거센 바람이 불기 때문인가? 이 바람을 이겨내지 못할 정도로 나는 아직 제대로 성숙하지 않은 것일까? 언제쯤이면 내가 이 바람을 이겨내고, 내 방황에도 마지막이 올까?

요즈음 들어서 나도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나도 이제는 가정이라는 곳에 정착해야할 때가 된 것일까? 그럴 정도로 나이를 먹기는 먹었다는 말인가?



지금 이 순간에는 내가 김효원이라는 회오리 바람에 흔들리고 또 빨려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나로 하여금 평정심을 잃게 하는 김효원의 매력은 도대체 무엇일까? 나이 어린 김효원에게 착한 심성만 없더라도, 내게 이런 일은 훨씬 덜 할 것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서 김효원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내가 보는 것을 알면서도 앞만 보고 있다.


반드시 거센 태풍만 커다란 위력을 가진 것은 아닐 것이다. 봄 날에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를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이 아무리 미약하다고 해도, 따뜻함을 가져오고, 홀씨를 날리게 해서, 생명의 기운을 트게 한다. 겨울에는 매서운 찬 바람이 혹독한 추위를 몰고 오지 않으면 들파에 사는 세균들이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 해에 따뜻한 계절이 왔을 때 여러가지 질병들이 들끓을 것이다.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 존재하던 것들이 무너지기도 하지만, 이 자연에는 바람이 불어야 생명이 발현되는 것들도 있지 않은가? 내가 그 바람을 간절한 마음으로 원하면, 아무리 약한 미풍이라고 해도 그 위력은 내 의지와 삶의 내용까지도 좌우할 수 있을 정도인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거센 파도나 쓰나미가 바다나 육지를 황폐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바다의 어느 한 곳에 고농도로 몰려있는 오염물질을 흩어지게 하여 멀리 보내서 분산시킨다. 그래서 그 바다에 살고 있는 다른 생명체들이 삶을 유지할 수도 있다.

불륜이나 일탈을 예찬하는 소피스트 같은 사악한 사람들은 간교한 논리를 편다. 한 때 우리의 가슴을 휘몰아치는 바람은 나를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이탈 시키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서 자신의 원래의 삶이 얼마나 소중했었는가를 깨닫게 해준다고 말한다. 이 얼마나 현혹되기 쉬운 달콤한 말인가?




그런데 지금은 김효원이 너무 오바하는 것 같다. 이대로 그냥 두면 김효원은 팔당이나 춘천을 거쳐서 동해안에까지 가게 될 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다.



"효원아."
"어?"

"너 지금 무슨 생각으로 자꾸 가니? 운전이 재미있어?"
"재미 있기도 하고. 그런데 아까부터 한강을 건널 만한 다리를 찾는 중인데요."

"나는 오늘 꼭 서울로 돌아갈 필요는 없으니까 괜찮은데, 효원이 너는 진심 걱정된다."
"오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야. 나 오늘 집에 가지 않아도 돼요."

"지금 배는 안고파?"
"별로. 오빠는요?"

"나도 괜찮아.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네 걱정이나 하자."
"오빠도 참. 내가 어린 애예요? 내 걱정을 왜 하세요?"





서울을 벗어나서 얼마 가지 않았는데, 호텔 레스토랑이라고 적힌 간판이 먼쩍거린다. 김효원은 그 곳의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들어간다.



"오빠. 더 가봐야 시간만 더 걸리고, 여기서 저녁 먹고 그냥 서울로 가자."




나는 김효원이 하자고 하는 대로 따르지만, 이 레스토랑 뒤로 호텔 건물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린다. 간판에 호텔이라고 적혀있으니까 호텔이지, 모텔 정도나 될까 의심스럽다. 혹시라도 김효원과 저 호텔에 갈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지?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파스타로 저녁을 해결했다.



"여기서 오빠랑 저녁을 같이 먹으니까 너무 좋아요. 정말 낭만적이야."
"겨우 파스타 한 그릇에 그 정도로 감동 먹어? 배가 엄청 고팠었나보다."

"저기 좀 보세요. 가로등 불빛이 쏟아지는 한강이 내려다 보이잖아요.
여기에 와인 한 잔을 곁들이면 진짜 좋겠다."

"서울에는 안갈 생각이니?"
"히이잉. .. 딱 한 잔만 해요."

"둘 중에 하나는 술을 마시면 안되잖아? 그럼 너 혼자 마셔."

"오빠. 뭐가 걱정이야? 여기 손님도 별로 없잖아요.
여기서 두세 시간 이야기 하면서 술 깨고 가면 되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두세 시간을 어떻게 여기에 앉아 있어?"
"아니면 저 뒤에 호텔에서 몇 시간 자고 가든가."

"너 진짜 말을 거침없이 막 하는구나?"
"처음에 출발할 때는 나보고 다 알아서 하라고 했잖아요."




김효원의 고집 앞에서 나는 무너져버린다. 효원이가 하자는 대로 하게 둔다. 김효원이 주문한 와인이 왔다. 우리는 잔을 들어서 건배하고, 천천히 마셨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생각으로 나는 딱 한 모금만 마셨다.



"벌써 취하면 어떡해?"
"취하는 것은 아닌데, 맥이 탁 풀려요.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고."

"그게 취하는 시작이다. 엄청 피곤했나봐."
"배가 약간 고픈데다가, 저녁도 먹고, 와인까지 들어가니까 그런가봐요."



그런데도 첫 잔을 비우더니 더 마시겠다고 한다. 나는 그녀의 두 번째 잔을 따랐다.



"갈 때는 내가 운전하면 되니까, 효원이 너는 차라리 한 잔 더 마시고 잠이나 푹 자라."
"그렇게 해주시면 더 고맙고. .. 헤헤."



김효원은 세 번째 잔까지 거뜬히 비웠다. 나는 계산을 하고, 김효원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당을 나가는데 김효원이 비틀거리는 바람에 나는 그녀를 부축하여야 했다. 김효원의 허리에 팔을 두르고 나에게 기대게 했다. 걸을 때마다 김효원의 가슴이 나에게 부딪혀온다.

우리는 차로 갔다. 김효원을 차에 태우려고 하는데, 그녀가 두 팔로 내 목을 단단히 감아서 당긴다. 우리는 거칠게 키스했다. 김효원은 아마도 술을 마시면 키스를 거칠게 하는 것 같다.



나는 그녀를 운전석 옆자리에 앉히고, 안전벨트를 매주었다. 그리고 내가 운전석에 앉았다.



"효원이는 이제 졸리면 자도 돼."
"미안해요."




나는 음악을 틀고 서울을 향해 출발했다. 그런데 김효원은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많이 했다. 나에게는 잘 된 일이다. 김효원은 이번 유럽 여행에 대하여, 특히 파리에 대하여 물었다. 그런데 파리 보다는 엠마가 관심사인 것 같다. 나중에는 엠마에 대한 것만 끈질기게 물었다.



"강대리님 말로는 파리에 오빠가 여자를 숨겨놨다는데, 정말 그래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내가 누구를 납치라고 해서 숨겨놓겠니?"

"금발의 쭉빵걸이라던데요. 그 여자분 직업이 의사라고도 했어요."
"그래. 그 말은 맞는 말이야. 그 여자분은 내가 아는 여자 의사 선생님이야."

"아는 여자라고요? 아는 정도가 아니라던데 .."
"그 여자 때문에 효원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라도 있어?"

"내가 걸릴 것이 뭐가 있어요? 완전 신기하니까 그렇죠."
"그게 뭐 그렇게 신기해?"

"여친이 파리 여자이고, 그녀는 파리에서 살고 있고, 오빠는 서울에서 소개팅에 나가고 .."
"이러언. 강대리 입이 무거운 줄 알았더니 .."

"아무리 입이 무거워도 공유할 것은 공유해야죠. 하하."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사생활인데, 그것을 공유해서 뭣에 쓰려고?"

"오빠가 완전 바람둥이에 카사노바라는 사실. 그것도 국제적으로. 하하."
"너 진짜 그런 소리 할래?"

"내가 뭐 틀린 소리 했어요?"
"아니."






언제쯤이면 엠마가 서울에 오겠다고 할까? 세월이 얼마나 더 흘러야 지금 김효원이 앉은 자리에 엠마를 태우고 이 길을 달릴 수 있을까?


우리는 서울로 들어섰다. 나는 방향을 정하기 위해 김효원에게 어디로 갈까를 물었다.



"집으로 갈꺼지?"
"오빠가 재워줄래요?"

"얘는?"
"그러니까 집으로 간다구요."



나는 김효원의 집 앞에서 차를 세웠다. 그녀는 내 입에 키스하고 나서 손거울을 들고 립스틱을 다시 고쳤다. 그녀는 차에서 내리고, 나는 집으로 출발했다.



"오늘 고마워요. 안녕히 가세요."



김효원은 그 자리에 꼼작하지 않고 서서 깜찍하게 손을 흔들고 있다.




갑자기 김효원이 앉아있던 자리가 텅 비어있다. 김효원이 재잘거리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내가 혼자라는 것이 싫은 것이 아니라, 김효원이 갑자기 없다는 것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나는 음악의 볼륨을 크게 했다.





집 앞에 도착하여 엘리베이터 안에서 생각하니까 정말 긴 하루가 드디어 막을 내린 것 같다. 집 안으로 들어서서, 나는 바로 욕실로 들어가서 씻고 나왔다. 옷방에서 잠옷으로 갈아입고 현관 문에 2중 자물쇠를 채웠다.

그런데 신발을 두는 곳에 웬 여자 신발 한 켤레가 있다. 굽이 그리 높지 않은 빨간 구두이다.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낯선 신발이다. 아까 내가 들어왔을 때에는 왜 눈에 띄지 않았을까? 아니면 이 여자가 내가 욕실에 있을 때 들어 온 것일까? 그랬다면 벨소리를 냈을 것이고, 그랬으면 내가 듣지 못했을 리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누구지?

주연이가 가고 나서 김효원이 왔다. 김효원을 보내고 나니까 또 여자인가? 산 너머 산이 아니라 여자 너머 여자이다.

나는 거실과 주방을 살폈으나 아무도 없다. 그렇다면 침실에 있다는 말이다. 외출할 때에 나는 항상 문을 열어두는데, 침실 문이 닫혀있다. 김효원이 닫았나? 나는 침실의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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