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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3 01:19 514회 0건
* 낙원의 주인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3부


“너무해.”
“미안해요…….”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보았던 것은 기진맥진한 선미 씨의 얼굴이었다. 그대로 잠이 들었던 걸까? 마치 몽유병 환자라도 된 기분이었다. 우리는 서로 알몸이었고, 심지어 선미 씨는 가슴골에다 내 얼굴을 껴안고 있기까지 했다.

내가 정신을 차리자 그녀는 그 후로 내내 나를 들볶았다. 그녀에게 대충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드문드문 기억이 나서 나는 반사적으로 사과부터 할 수밖에 없었다. 부분적으로나마 기억이 난다는 것은, 뒤집어 생각하면 그래도 그 순간의 내게 이성이 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렸다면 아예 기억 자체가 남아있지 않았을 테니까.

그래서 더더욱 무서웠다. 이성이 남아있었음에도 그토록 폭력적인 성향이 드러났다니……. 경우에 따라선 그 이성이라는 게 아무런 도움이 안 될지도 모른다는 뜻 아닌가. 게다가, 만약 그 상태가 더더욱 극한까지 치달았다면 나는 대체 그녀에게 무슨 짓을 저질렀을까?

“나 정말 죽는 줄 알았어. 알아?”
“정말 미안해요. 많이 힘들었어요?”
“그래!”

폭군처럼 굴었던 내가 유순하게 변하자, 선미 씨는 조금이라도 더 나에게서 사과의 말을 듣기 위해 애쓰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아까전의 고통과 수치를 보상받고 싶은 걸까? 물론 그녀의 마음이야 어쨌건 간에 나는 그녀에게 사과를 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너무하다고 한 게 아냐.”
“그럼요?”
“결국 다른 여자에게서 생긴 욕망을 나한테 대리만족으로 풀었다, 이거 아니야?”
“…….”

차마 거짓말을 할 수는 없어서 그녀에게 솔직하게 말하고 말았다. 그녀는 내가 육체에 새긴 고통보다도 자존심에 입은 상처가 더 컸는지 눈에 띄게 언짢아하는 기색이었다. 하기야 지연 씨로 인해서 불거진 욕구를 선미 씨의 몸을 이용해 풀었으니…… 그녀에게 있어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엄청난 굴욕이었을 것이다.

“미안해요. 내가 정말 죽일 놈이에요……. 선미 씨 기분이 풀릴 수 있다면 내가 뭐든 할게요.”
“휴우…….”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다시피 용서를 구하자 선미 씨는 여전히 나를 품에 안은 채로 한숨을 푹 쉬었다.

“일단 윤호 씨는 나한테 죄 지은거야. 이건 특히나 두고두고 보상받을 거니까 잊지 말고 확실히 기억해. 알았어?”
“알았어요.”

그녀가 나를 안고 있다는 게 한편으론 안심이 되면서도, 또 한편으론 불편하기도 했다. 그녀가 남편과 함께 썼을 이 더블베드에 내가 대신 누워있다는 사실이 내 마음을 못내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것 같았다. 거기에 폭력에 대한 죄책감까지 더해져 여러 가지 의미로 양심이 괴로웠지만…… 그래도 우선은 그녀를 마주 안았다.

“아얏.”

엉덩이를 주무르다가 골짜기 안쪽으로 손을 슬며시 밀어 넣자 선미 씨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러고선 왠지 나를 힐난하는 눈으로 올려다보는 그녀.

“왜요?”
“윤호 씨 때문에 조금 찢어진 것 같아.”
“아, 아파요……?”
“궁금하면 한번 똑같이 당해볼래?”
“미안해요……. 연고 같은 거라도 바를까요?”
“됐거든.”

선미 씨는 일부러 더 퉁명스럽게 구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녀의 몸을 거꾸로 번쩍 들어다 내 몸 위로 태웠다. 엉덩이를 내 얼굴 쪽으로 향하게끔 만들고 내가 그녀의 은밀한 계곡 안쪽을 들여다보자 선미 씨가 내 사타구니 근처에 놓인 얼굴을 슬며시 돌려 물었다.

“뭐하는 거야?”
“빨리 괜찮아졌으면 해서요.”

짐승이 상처를 핥는 것처럼 나는 그녀의 음부와 항문 주변을 혀끝으로 훑었다. 빳빳하게 세운 혀끝으로 두 구멍 사이를 오가며 깊숙한 곳까지 애무를 가하자 그녀가 엉덩이를 들이민 채 내 허벅지에 얼굴을 파묻고는 몸을 찌르르 떨었다.

“아으응…… 무. 무슨 병 주고 약 주는 것도 아니고……”
“많이 아팠죠? 호해줄게요.”

두 구멍에 번갈아 뜨거운 숨결을 불어주자 그녀는 간지러운 느낌이 드는지 키득대며 웃음을 터뜨렸지만, 또 한편으로 배배 꼬인 비음을 내뱉었다. 내가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가한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기라도 하듯 그녀의 애널 주변은 살갗이 온통 새빨갛게 부어올라있었다.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라도 나는 열심히, 그리고 부드럽게 그 예민한 곳을 정성껏 애무했다.

“으, 으으응……!”

할짝거리는 소리가 방 안에 추접스럽게 한가득 울려 퍼질 때쯤 그녀도 가랑이 사이에서 얼굴을 들고는 내 물건을 입에 물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69체위로 이어졌다.

“아……”

애무에 열중하던 내 입에서도 신음 한 줄기가 새어나왔다. 쪼그라들어 있었던 물건은 다시 슬금슬금 고개를 세우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만 해도 불알이 텅텅 빈 것처럼 느껴졌는데 어느새 다시 불길을 지피는 것을 보면, 그녀의 펠라치오 솜씨는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대단해…… 아직도 세울 수 있는 거야? 그렇게 많이 해놓고.”
“내, 내가 얼마나 했는데요?”
“모르겠어. 다섯 번까지만 세고 그 뒤로는 세질 않아서.”

오뚝이처럼 다시 살아난 내 기둥을 선미 씨는 신기하다는 듯이 쥐고 흔들어댔다. 그녀가 손으로 감싸 쥐고 부드럽게 용두질을 쳐주면서 혀끝으로는 불알 주름을 건드리니, 나는 애무하던 것도 잊고 쾌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렇게 어마어마한 욕정을 평소엔 그렇게 꾹꾹 숨기고 사니까, 한번 회까닥 해버리면 주체가 안 는 거라구. 내가 보기에 윤호 씨에겐 배출구가 꼭 필요해.”
“배출구…… 여자 말인가요?”
“꼭 섹스가 아니더라도 말야. 아무래도 윤호 씨의 그 문제는 정서적인 원인이 크지 않겠어?”
“…….”

문득 샐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면이라…….

“풀지 못하는 것들이 점점 속으로 쌓이기만 하면 누구라도 위험한 상태가 된다고. 뭐, 윤호 씨 경우에는 충동성이 좀 심하긴 하지만…….”
“상담이라도 받아보는 게 좋을까요?”
“그것도 방법이 되겠지. 그렇지만 난 윤호 씨 스스로 생각해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봐.”

별 것 아닌 말들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조언에서는 왠지 모를 연륜이 느껴졌다. 비록 이렇게 부도덕한 관계로 지내고 있긴 했지만 이따금씩 그녀는 내게 연장자다운 모습을 보여줄 때가 있었다. 그 또한 그녀의 매력이었고, 내가 그녀에게서 안정감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했다.

“고마워요.”
“뭐가?”
“내가 이렇게 심한 짓을 하는데도 매번 날 이해해주잖아요. 내 입장에서 생각해주고…….”

부끄러워하면서도 내가 그렇게 말하니 그녀는 자세를 바꾸어 다시 내 옆에 나란히 누웠다. 애무가 끊어져 아쉽기도 했지만 그녀도 지금은 대화가 더 필요할 때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후훗, 그래. 알면 됐어. 그렇다고 아무 여자에게나 눈 돌아가서 일 저지르면 안 돼. 윤호 씨도 알겠지만 모든 여자들이 나처럼 이해해주는 건 아닐 테니까……. 그러니 항상 스스로 조심해야 해. 알지?”
“그럼요…… 물론이죠. 그래서 더 고맙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지연이라는 학생에겐 행여나 실수하지 않도록 조심해.”

아마 지금도 이 얇은 벽면 너머에 있을 지연 씨를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내가 그녀로 인해 이성을 잃고 옆집에 사는 선미 씨를 덮쳤다는 사실을 그녀는 과연 짐작이나 할까.

“근데 윤호 씨, 나 궁금한 게 있어.”
“뭔데요?”
“예전에 나 처음 덮쳤을 때 말이야. 기억나?”

끄집어내기엔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녀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데 내가 부끄러워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긴 했다. 나는 멋쩍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띄엄띄엄 기억나요…….”
“조금이나마 기억이 남아있다는 건 그래도 이성이 있었다는 거랬지?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다면 기억이 없었을 거라고 얘기했잖아.”
“맞아요.”
“그럼 처음에 날 덮쳤을 때도, 이성이 남아있었다는 거잖아. 세상에…… 그럼 완전히 꼭지가 돌아버리면 도대체 어떤 모습이 된다는 거야?”
“……,”

그녀는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상상하는지, 호기심과 두려움이 반반씩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어떤 모습을 떠올리고 있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지만 거기에 대해선 확실히 대답을 해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로서도 알 수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잘 모르겠어요. 사실 나도 그게 궁금해요.”
“지금까지 그랬던 적이 있었어? 기억이 아예 날아갈 만큼 심각했던 경우가.”

질문을 듣고 생각에 잠긴 나를 바라보던 선미 씨가 뒷말을 덧붙였다.

“아, 하긴 그런 적이 있었으니까 윤호 씨 스스로 알고 있는 거겠지.”
“그래요. 딱 한번 있었어요.”

그러자 선미 씨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 빛났다.

“언제? 언제였어? 나한테 얘기해줄 수 있어?”
“어…… 음, 그건……”
“왜? 말하기 곤란해?”
“뭐 꼭 그렇다기보다는…… 정확히 기억이 안 나니까 이야기하기도 힘드네요.”
“그 때도 여자문제였어?”
“네…….”

곤란해 하는 기색을 드러냈으니 평소의 그녀였다면 눈치껏 넘어가줄 법도 하련만, 그녀는 오죽 그것이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호기심을 참을 수가 없는지 그녀는 꽤 구체적으로 물어왔다.

“상대는 누구였는데? 오늘 옆집 학생에게 그런 것처럼 어쩌다보니 그렇게 흥분한 거야?”
“아니요. 여자친구였어요. 그 때 잠깐 이야기했던…… 예전에 헤어진 여자친구요.”

샐리에 이어 선미 씨까지……. 이상하게도 오늘은 아주 깊숙이 묻어두었던 기억을 두 번이나 끄집어내게 되었다. 물론 그것을 떠올리는 것이 특별히 고통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다. 실제로 그 기억의 중요한 부분은 머릿속에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굳이 떠올리고 싶을 만큼 유쾌한 경험이 아닌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아하.”

선미 씨는 더더욱 궁금해졌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배려해주었다.

“으음, 알았어. 더 안 물을게. 호호.”
“궁금한가요?”
“물론 궁금하기야 하지. 그래도 난 윤호 씨의 숨겨진 모습이 궁금할 뿐이지, 굳이 싫은 기억을 들춰내고 싶은 게 아니니까.”
“고마워요.”
“고맙긴. 그래도 기회가 되면 한번 보고 싶긴 해.”
“네?”
“윤호 씨가 완전히 눈 돌아간 모습 말이야.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심한 모습이 있다고 생각하니까 괜히 궁금하잖아?”
“그게 왜 궁금해요……?”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아.”
“재미라뇨…… 방금 전만 해도 힘들어했잖아요.”
“치, 바보야. 힘들긴 했지만 그렇다고 힘들기만 했던 건 아니었어.”

위험을 즐기는 스릴이라는 걸까……? 나로선 쉽사리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그래도 남들에게 밝히기 힘든 내 모습을 알고도 그걸 그렇게 받아들여주는 그녀가 나에게는 왠지 특별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어떤 형태로든 깊이 키우는 것은 나에게도, 그녀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다음 주부턴 한동안 윤호 씨랑 자주 보진 못하겠다.”
“네? 왜요?”
“남편이 오거든.”

때마침 그녀는 우리 관계를 명확하게 규정하는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태연한 척 당황하지 않고 그녀를 마주보았지만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쓰리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군요.”
“후후, 아쉬워?”
“…….”

아니라고 대답해봐야 무슨 도움이 될까. 난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러자 선미 씨도 더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고, 우리는 그렇게 알몸으로 나란히 누워 있다가 잠이 들었다.


*


잊고 지냈던 기억을 끄집어낸 영향이었는지 꽤 이상한 꿈을 꾸었다. 하지만 일어났을 땐 꿈의 내용을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그리운 얼굴만큼은 깨어나고 나서도 한동안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새삼스레 이런 기분을 느낀다는 게 우스웠다.

‘잘 지내고 있을까?’

괜히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어 털어버렸다. 누웠던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니 왠지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방 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 잠들던 곳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선미 씨는 이미 나가고 없었다. 유부녀의 집에 홀로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이 왠지 당황스러워 나도 다급히 누웠던 자리를 정리하고 그녀의 집을 나섰다.

“윤호, 좋은 아침!”
“아…… 샐리.”

관리실로 내려오다가 입구에서 그녀를 마주치자 나는 괜히 뜨끔해서 허둥거렸다. 혹시라도 선미 씨의 집에서 나오는 모습을 그녀가 봤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다행히도 그런 낌새마저 눈치 챌 겨를이 없을 정도로 걸음이 바빠 보였다.

“어, 어디 가는 길이에요? 학교?”
“으응. 완전 지각이야. 아침 수업인데…….”

오죽 급한 모양인지 몇 마디 대화도 채 하지 못하고 그녀는 헐레벌떡 달려 나갔다. 왠지 넘어질 것만 같은 그 위태로운 모습이 신경이 쓰여 그 모습을 잠깐 지켜보다가, 나는 그녀를 따라 밖으로 나가보았다. 도로변까지 나가보니 그녀가 안절부절 못하는 모습으로 오고 가는 차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 얼굴을 본 그녀가 울상이 된 얼굴로 말했다.

“아아. 택시가 안 잡혀……. 지하철 타면 늦는데.”
“늦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게…… 전에도 지각을 많이 해서 이젠 출석 점수가 위험해. 힝……”

딱히 나와 상관이 없는 일이긴 했지만,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신경을 끄는 것도 힘들었다. 마치 갈팡질팡하는 강아지를 보는 느낌이랄까. 하긴 매사에 덤벙대는 샐리가 가끔 보호본능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사실이었다.

“태워줄까요?”
“어?”

불쑥 그런 말을 꺼내자 그녀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학교까지 태워다줄게요.”
“아, 아니야. 윤호가 왜……”
“그럼 계속 그러고 있을 거예요?”
“…….”

평소에는 그렇게나 자주 보였던 택시들이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유독 보이지 않았다. 하염없이 고개만 내밀고 도로를 지켜보던 샐리가 난감한 표정이 되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그래도 윤호가 택시기사도 아닌데 그런 부탁을 하는 건……”
“뭐 어때요. 지금은 딱히 할 일도 없는데.”
“아무리 그래도……”
“평소 나한테 요리 많이 해줬으니까 답례라고 생각해요.”
“…….”

확실히 어려운 상황이긴 했는지, 내가 몇 번이고 돕겠다고 나서자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하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눈치였다. 차마 결정을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서 내가 말했다.

“차 가지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요.”
“아, 으응…….”

애매하게 고개를 끄덕끄덕 하는 모습을 보니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확실히 그녀는 어딘가 강아지를 닮은 구석이 있었다.


*


“저기, 윤호…… 고마워.”
“천만에요.”
“아니야, 정말정말 고마워. 꼭 보답할게.”
“무슨 보답이랄 것까지야…… 얼른 들어가 봐요.”

다행히 그녀의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캠퍼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사실 그녀를 위해서이긴 했지만 나도 바람을 쐬고 싶어서 나온 것이니 그렇게까지 고마워 할 필요는 없었는데도, 샐리는 마치 대단한 은혜라도 입은 듯 계속해서 고맙다는 말을 했다. 보조석 창문을 통해 몇 번이고 인사를 하던 그녀는 수업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오자 나중에 보자는 말을 남기고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샐리는 좋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구나.’

그러고 보니 그녀의 학교가 어디인지 딱히 물어본 적이 없었다. 캠퍼스에 들어와 보고 나서야 알았지만 그녀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대학에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먼 곳까지 와서 쓸쓸히 유학생활을 하는 그녀에게 너무 신경을 못 써준 건가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그녀와 그리 친밀한 관계도 아닌데 지나치게 오지랖을 부리는 것 같아서 이내 털어버렸다.

‘캠퍼스…… 오랜만이네.’

예전엔 나도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비록 자퇴해버리긴 했지만…… 다니는 동안엔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도 했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그저 평범하게 공부해서, 평범하게 졸업하고, 평범한 회사에 들어가 월급이나 받으면서 살게 될 줄 알았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면서 너무나 많은 것이 바뀌어버렸다.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은 나이에 건물 하나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만약 내게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면 나는 차라리 부모님이 살아계신 채로 평범하게 살고 싶었다. 그런 감상에 젖었기 때문일까, 평범한 20대들이 오고가는 그 캠퍼스의 풍경은 왠지 나에게 향수 이상의 어떤 그리움을 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잠깐 둘러볼까?’

주차장에 차를 대고는 나는 잠시 캠퍼스를 거닐어보았다. 곳곳에서 젊음의 에너지가 느껴져서 나는 퍽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나도 아직 20대인데 활발히 오고가는 학생들을 보면서 ‘젊다’고 느끼는 것이 우스웠던 것이다. 그런 기묘한 기분으로 이곳저곳을 둘러보다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어라? 윤호. 왜 아직까지 여기 있어?”
“엇.”

충분히 캠퍼스를 돌아보고 다시 주차장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느새 수업을 마친 샐리가 건물에서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나 오래 돌아다녔다니…….

“아, 그냥 좀 여기저기 구경을 하느라…….”
“히히, 거짓말. 나 기다린 것 같은데.”
“…….”

그게 그렇게도 해석이 되는구나. 좀 억울하긴 했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기로 했다.

“마침 잘됐다. 나 윤호에게 뭐라도 해주고 싶었는데, 그럼 우리 같이 점심 먹을까?”
“네?”

보답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긴 했지만 그녀가 그런 제안을 던지자 조금 갑작스러웠다. 샐리 같은 미녀와 밥을 먹는다니……. 왠지 호의에 대한 대가를 넘어서 일종의 데이트로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그거야말로 나만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괜히 들뜨지 않으려 애썼다.

“윤호, 뭐 좋아해? 먹고 싶은 거 있어?”
“글쎄요…… 이 주변은 잘 몰라서요. 그럼 아무거나 상관없으니 샐리가 좋아하는 곳으로 데려가줄래요?”
“아, 그럴까?”

그렇게 어쩌다보니 그녀와 식사를 하기로 하고 캠퍼스를 함께 내려오게 되었다. 이 느닷없는 상황 앞에 긴장했기 때문인지 걸음을 옮기는 내내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저 그녀의 사소한 이야기들을 조용히 듣기만 했다.

샐리와 함께 캠퍼스를 걷는 동안 느낀 점이 있다면, 그녀가 먼 나라에 와서 쓸쓸히 유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게 순전히 내 착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어찌나 인기가 많았는지 불과 몇 걸음 걸을 때마다 새로운 얼굴들이 매번 그녀에게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특히나 그 중의 몇몇 남학생들로부터는 무척 열렬한 인사를 받곤 했다.

“하이, 샐리. 점심 먹었어? 나랑 파스타 먹으러 갈까?”
“안 돼. 나 지금 윤호랑 약속이 있어서.”
“윤호? 윤호가 누구야?”

도서관 앞에서 만난 그 남학생은 내가 옆에 있는걸 보고도 꽤나 끈질기게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그만큼 친한 사이인 걸까 싶어서 조금 신경이 쓰이기도 했지만 샐리의 반응을 보니 딱히 그런 것도 아닌 듯 했다. 샐리가 나를 가리키자 남학생은 조금 경계하는 눈빛으로 내 이모저모를 살펴보았다. 나는 그 시선에서 직감적으로 시기심을 읽을 수 있었다.

“음…… 누구야? 설마 보이프렌드?”
“그런 거 궁금해 하지 마. 그리고 윤호가 듣고 있는데 실례잖아.”
“아니, 그, 그렇지만……”

샐리는 당황하는 남학생을 제법 매몰차게 뿌리치고는 나를 이끌었다. 그녀의 평소 성격으로 봐서는 그런 단호한 모습은 무척 의외였기 때문에 나는 속으로 조금 놀랐다.

하지만 그 후에도 그런 상황은 몇 차례 더 반복되었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그녀에 대한 관심 덕분에, 나는 덩달아 자연스럽게 의문 섞인 시선을 받게 되었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나의 존재를 궁금해 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거의 백이면 백, 남학생들의 경우는 아까의 그 학생처럼 나에게 시기 어린 눈길을 보냈다.

“미안해. 조금 불편하지?”
“아, 아니요.”

오죽하면 샐리가 거북해하는 내 표정을 읽고 사과를 했을까.

“샐리는 인기가 많네요.”
“인기? 설마.”

그녀의 대답은 터무니없는 겸손에 가까웠다. 하지만 겸손의 수준을 넘어서 어쩐지 그녀는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여기야. 얼른 들어가자.”

샐리가 나를 이끌고 도착한 곳은 의외로 양식 가게가 아니라 한식 전문점이었다. 샐리는 한식을 좋아하는 걸까? 그러고 보니 그녀가 해주었던 요리들도 생각해보면 한식이 많았다.

“어때? 맛있어?”
“네, 맛있네요.”

소박하지만 맛있는 곳이었다. 사실 독거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가정식을 먹을 기회가 그리 흔치 않았기에 나는 정말 만족스런 식사를 했다. 내가 흡족해하는 모습을 보고 샐리도 뿌듯해하는 눈치였다.

비록 사심을 크게 섞진 않았지만, 어쨌건 그녀만한 미인과 화기애애한 식사를 한다는 것은 남자로서 무척 즐거운 일이었다. 바람을 쐬러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도중에 불청객이 끼어들지만 않았더라도, 그 들뜬 기분을 이기지 못하고 샐리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을 것이다.

“어머, 샐리 아니야?”
“어? 미, 미나……”

샐리의 인기는 이곳에서도 빛을 발하는 모양인지, 한창 식사를 하던 도중 누군가가 불쑥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갑작스런 목소리에 나도 덩달아 샐리와 함께 고개를 들었다.

“이런데서 다 만나네. 식사하는 중?”
“아, 으응.”
“어라, 같이 온 사람은 누구야? 혹시 남자친구?”

캠퍼스에서부터 마주친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가 그녀의 남자친구인지를 궁금해 했지만 솔직히 내 귀에는 그 질문이 퍽 형식적으로 들렸다. 누가 보더라도 샐리와 나의 외모수준은 격차가 너무 컸고, 그들의 목소리에서도 ‘설마 아니겠지’하는 기색이 은연중에 느껴져 왔다.

“아, 음…… 그러니까, 윤호는…… 뭐라고 설명해야하지……”

하지만 샐리가 설명을 하기도 전에 그 불청객은 불쑥 그녀의 옆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저는 샐리 친구 미나라고 해요. 같이 좀 앉아도 되죠?”
“네?”

미나라는 이름의 그 여학생은 다짜고짜 테이블 너머로 내게 인사를 했다.

“샐리를 오랜만에 보니 너무 반가워서요. 실례가 안 된다면 좀 앉았다 가도 되겠죠?”

충분히 실례가 되는데요……, 하고 대답하고 싶었지만 어쩐지 샐리 앞에서 좀스러운 남자로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네…… 뭐, 샐리만 괜찮다면요.”
“샐리는 저랑 같이 있는 거 좋아해서 괜찮아요. 그치?”
“…….”

하지만 샐리는 별 대답을 하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끼어드는 여학생의 태도가 조금 황당하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함부로 싫은 티를 내기엔 입장이 좀 애매했다. 그녀가 샐리와 친한 사이라면 오히려 그들 입장에서는 내가 훼방꾼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근데, 그쪽은 누구세요? 설마 진짜 남자친구?”
“저는…… 그러니까, 샐리가 살고 있는 건물의 관리인…… 입니다.”
“관리인……?”
“너무 캐묻지 마. 처음 보는 사람에게 실례잖아.”

그제야 잠자코 있던 샐리가 입을 열었다. 샐리는 나를 대신해서 지금 살고 있는 원룸 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했고, 설명을 들은 여학생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아아…… 그랬구나. 흠, 신기하네.”
“미나 씨라고 했죠? 혹시 유학생이신가요?”

굳이 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았기에 나는 일부러 화제를 돌렸다.

“아뇨, 보다시피 저는 한국인이에요. 이름이 좀 유학생처럼 보이긴 하죠? 호호. 그 덕분에 샐리랑 친해지긴 했지만.”
“그러네요.”

한눈에 보기에도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나는 샐리의 곁에 앉아있으니 그녀가 도저히 유학생으론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화장이 진한 데다 눈매가 도발적이라 그런지, 동양적인 느낌에도 불구하고 기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나 잠깐 친구랑 얘기 좀 하다 갈게!”

미나 씨는 함께 왔던 일행에게 먼저 가라며 손짓을 했다. 일행이 모두 밖으로 나가버리자 샐 리가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 나랑 윤호도 어차피 곧 나갈 생각이었는데…….”
“그래? 그럼 카페에서 커피나 한잔 마실까?”
“나 수업이 급해서……”

어영부영 계산을 하고 셋이서 가게를 나왔다. 샐리가 내 몫을 내주었기에 나는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에게 고맙다며 인사했다.

“잘 먹었어요, 샐리.”
“보통 이런 건 남자가 사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네?”

뜬금없는 미나 씨의 한 마디에 내가 당황하자, 샐리가 발끈하여 대꾸했다.

“내가 윤호랑 약속이 돼있었던 거야. 모르면서 왜 함부로 말을 해?”
“어머, 샐리 너 화났니?”
“…….”
“참, 너 다음 학기엔 기숙사 들어올 거지? 네가 없으니까 나 심심한데.”
“나는…… 계속 원룸에서 살 거야.”
“왜? 비싸기만 할 텐데. 돈 아깝지 않아?”

하지만 샐리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샐리를 보며 미나 씨는 뜻 모를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기, 윤호 씨라고 했나요?”
“네.”
“관리인이라고 하셨죠? 혹시 샐리가 사는 건물에 빈 방이 또 있나요?”
“그, 글쎄요. 그건 부동산에 한번 물어보시는 게…….”

사실 내 소유의 건물인 만큼 빈 방이 남아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선뜻 대답할 순 없었다. 내가 주인이라는 사실은 샐리조차 모르는 거니까.

“그건 왜 물어봐?”

침묵으로 응수하던 샐리가 결국 미나 씨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날카롭게 물었다. 하지만 미나 씨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냥! 궁금해서.”
“…….”

잠시 후 신호등이 바뀌자, 미나 씨는 샐리에게 손을 흔들었다.

“수업이랬지? 아쉽지만 커피는 다음에 마시자. 그럼 난 이만 갈게.”
“그래…….”
“윤호 씨, 그럼 조만간 또 봐요!”

도로 건너편으로 달려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왠지 그 ‘조만간’이란 표현에 신경이 쓰였다. 샐리를 돌아보니 그녀는 무척 애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샐리.”
“응?”
“저 친구랑 안 친해요?”
“왜, 왜 그렇게 생각해?”
“…….”

티가 나도 너무 나는데요, 하고 마음속으로만 대답해주었다.

“나 가볼게. 오늘 정말 고마웠어.”
“내가 더 고맙죠. 이따가 원룸에서 봐요.”
“으응.”

샐리를 캠퍼스 입구까지 데려다주고는, 나는 차를 타고 다시 건물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 내내 왠지 싱숭생숭한 기분을 느꼈다.


- 다음 화에 계속 -


열심히 쓰겠다고 시작한 글인데 2부까지만 써놓고 신경을 못 썼네요
오랜만에 3부를 올리는 듯 합니다
요새는 주로 단편을 쓰긴 했지만 반응이 좋으면 낙원의 주인도 열심히 쓰고 싶네요
내일은 또 월요일이군요... 다들 화이팅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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