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셔요.”

시녀의 목소리와 눈꺼풀을 자극하는 햇살에 공주는 부스스 눈을 떴다. 침대에는 공주 혼자뿐이었다. 어젯밤 바늘에 찔리는 것 같은 충격을 선사했던 왕은 자리에 없었다. 아마 공주보다 일찍 일어나 나간 것이리라. 시녀의 시중을 받으며 제대로 된 옷을 걸친 공주는 밖으로 나갔다. 병사들은 전쟁 중에 세워진 막사를 걷어내고, 포로들의 수를 헤아렸으며, 또한 아군의 부상병들을 돌보며 일사분란하게 고국으로의 출발준비를 하고 있었다. 왕은 간편한 평상복 차림으로 병사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왕의 막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는 공주를 위해 마련된 것인 듯 다홍색 휘장이 쳐진 가마가 세워져 있었다. 왕은 공주가 바로 뒤에 서있는데도 아는지 모르는지 미동도 없었다.

*

전쟁의 뒷수습이 끝나고, 왕의 행렬이 위풍당당하게 왕의 수도로 행진하기 시작했다. 공주는 말을 탄 왕의 바로 뒤편에 따라가는 가마에 앉아있었다. 공주는 가끔 갑갑할 때면 작은 창문으로 바깥 풍경이나 왕의 굳건한 뒷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어쨌든 공주는 왕이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크게 얻은 보물이었고, 따라서 극진한 보살핌 속에 수도로 입성했다. 왕은 수도로 오는 동안 단 한번 공주를 찾았다.

“와아아아아-!”

갑자기 들려오는 함성소리에 공주는 깜짝 놀랐다. 살짝 열린 창문으로 왕의 백성들이 환호하는 모습이 보였다. 또 한번 당당한 승리를 백성들에게 안겨준 자랑스러운 왕. 백성들은 왕의 귀환을 진심으로 축하하고 있었다. 수도의 크고 웅장함도 공주가 지금까지 살아왔던 다비국의 그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거대했다. 왕이 한쪽 손을 들어 백성들에게 화답했다. 백성들의 환호소리가 더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더 전진하다가 육중하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왕궁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잠시 멈춰있던 왕의 행렬이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공주는 휘장을 닫았다. 높이가 20미터는 될 듯한 거대한 철문에 새겨져있는 야수의 조각상이 공주를 위협했기 때문이다. 공주는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당신의 거처는 수강궁(水江宮)이오."

왕이 창문을 벌컥 열면서 말했다. 그 바람에 공주는 흠칫 놀랐다. 왕의 머리는 지난 동안 아무렇게나 뒤로 넘기거나 흐트러진 모습이 아니라 단정하게 빗어서 뒤로 묶어 내리고 있었다. 왕의 얼굴이 한층 더 단정해 보인다고 공주는 생각했다. 그러나 왕은 그 한마디만을 남기고 다시 창문을 소리 나게 닫았다.

*

그 날로부터 왕은 갑자기 공주를 찾지 않았다. 공주는 아마 왕이 바빠서 그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공주에게 있어서 그런 건 하등 문제될 것이 없었다. 왕이 자신을 찾든지 말든지, 이 한적하고 아름다운 수궁에 떨궈 지듯 배치된 그녀에겐 아무런 관심도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수강궁의 시녀들은 여기에 들어온 후부터 말 한 마디하지 않는 공주를 다소 이상하다는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지만 그것 역시 공주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당연히 공주는 홀로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공주는 하루 종일 산책을 하거나 호수를 바라보면서 자신의 어린 시절이나 왕에 대해 생각했다.

어렸을 때……. 공주의 어머니는 궁궐의 시녀였고, 다비실라이 - 즉, 공주의 아버지에겐 정궁(正宮)이 있었으나 그녀는 자식이 없었다. 다비실라이는 왕의 손에 죽음을 당하는 그 순간까지 공주나 공주의 어머니에게 하등의 관심도 두지 않았다. 공주는 어렸을 때부터 궁궐의 시녀들이 정궁인 황후가 투기가 심해서 그런 것이라고 수군거리는 소리들을 심심찮게 들었다. 다비실라이가 공주나 그녀의 어머니에게 조금의 관심이라도 보인다면 그 둘은 황후에 의해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들 했다. 그래서 아버지는 공주와 공주의 어머니를 궁궐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별궁에 가둬두고 때때로 필요한 음식이나 옷가지들을 보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았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공주의 어머니가 그런 것들에게 관심을 보일 리 없었다. 공주가 왕자로 태어났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당연히 딸에게 관심이 없었던 공주의 어머니는 미쳐서 죽었다. 공주가 열 살 때의 일이었다. 그때부터 공주는 자신에 관한 소문이나 미쳐서 죽은 어머니가 꿈에 나타나 비명에 깨어나는 날이면 그런 기억들을 잊기 위해 끊임없이 혼자 생각하거나 노래를 흥얼거리는 버릇을 익혔다.

그러나 어쨌든, 그 날부터 공주는 혼자가 되었다. 다비실라이는 공주를 아버지로서 찾아주지도 않았고 시녀들도 그녀가 불편하지 않도록 모든 것을 배려해 주었기 때문에 공주는 별로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아무도 공주의 가슴에 어떤 상처가 생겼는지 몰랐다. 그리고 육년이 흘렀다.

그사이 공주는 말을 해야 하는 필요성을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 육년 동안 다비국과 그 주변에는 다비국의 별궁에 갇혀있다는 아름다운 공주의 이야기가 시인들에게 미화되어 널리 퍼졌다. 그러나 공주는 어느덧 사람들에게나 그 무엇에게나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소녀가 되어있었고 그런 덕분에 웃지도, 울지도, 그밖에 어떤 표정도 짓지 않고 말도 하지 않는 이상한 소녀가 되었다.

공주가 이런 것들을 생각하며 수강궁에서 소일하는 동안 왕의 소문들이 공주의 귀에 흘러들었다. 백성들과 대신들이 일컫기를 왕은 타고난 전사라 했다. 적에게는 가차 없는 잔인하고 냉혹한 왕은, 급기야는 부친과 형제들을 죽이고선 그 자리에 올랐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왕은 경외의 대상이었다. 왕은 전쟁과 나라의 번영에만 관심이 있다고 했다. 그동안 수많은 정복지의 여인들이 왕에게 바쳐졌지만 왕은 그저 무심하게 발길을 돌렸다. 그렇기 때문에 항간에는 왕이 남색가라고도 했다. 비록 왕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왕이 자신을 찾지 않는 것이 적어도 그런 소문이 진실이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

공주는 손에 잡히는 꽃가지를 꺾어서 호수로 집어던졌다. 마치 거울처럼 쪽빛하늘을 비춰주고 있는 호수에 흰 꽃잎들은 요정을 위한 놀잇배처럼 천천히 떠다니기 시작했다. 공주가 일어서서 돌아가기 위해 뒤로 돌았다. 그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공주를 가로막았다. 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