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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20:34 385회 0건
<홍련현신>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강희를 뒷자석에 태운 채, 한웅은, 자신들이 즐겨 찾는, 그리고 강희도 좋아하는 공원 쪽으로 차를 몰아 갔다. 유정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강희를 연신 어루만졌다.


저녁이 될 무렵에 그곳에 도착했다.



휘이잉~



을씨년스럽게 불어대는 차가운 바람이, 그들의 심정을 대변하듯 몰아쳐대고 있었다.



정안은, 강희와 1:1로 처음 만났던 그 자리, 그 벤치에, 강희가 좋아하는 자리에 그녀의 몸을 앉히고선, 강희의 손목을 잡아주었다.


"누나...자요?"



여전히 대답 없는 강희. 일체의 표정조차 없다. 그런 그를 보면서 한웅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고 유정은 끝없이 눈물을 떨궜다.


한웅은 인상을 찡그리고 있다가, 말했다.



"이런 곳에 있지 말고....바로 병원에 가보자....상태가 어떤지......."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을 보는 정안의 눈가엔,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절망의 눈빛이었다.



"....하....."



한웅은 할말을 잃었다. 정안의 몸속에 도사리는 절망의 깊이를 느꼈기에.


차 안에서 강희의 몸상태에 대해 유정이 말을 해댈때, 두 남학생은 삽시간에 온몸에 땀이 맺혔었다.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도 모를정도로 미약한 숨결. 잠들었다고 보기엔 너무나 창백한 안색. 차디차가운 몸.


모든게 최악이었다. 그들은 입밖에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외쳤었다.


늦었다고....이미 늦었다고......너무 늦었다고.....




화끈한 여학생, 열정이 있는 여자애. 바람같은 여자애. 최강희.



그녀와 차가움은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그녀에겐 온기가 필요하다. 그녀는 정녕 그래야 한다.


하지만....그녀의 몸은 지금....식을 대로 식어 있다.....


"온기...온기를......"


어루만지는 강희의 손등에 눈물을 떨구고 뺨을 비벼대면서 정안은 외쳤다.


"제발.....누구 없나요.....강희 누나에게.....온기를......."




그때였다.



오로지 그 네명만 있는 것같은 공원에, 세상과 차단된 것같이 을씨년 스러운 바람만이 휘돌던 공원에....


따스함이 깃들기 시작했다. 온기가 퍼지기 시작했다. 아니, 점점 따뜻해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열기라고 할만한 것이, 진정안을, 한유정을, 김한웅을 감싸고 있었다.


"...무...무슨...."


무슨 일이지 하는 심정에 세 사람은 중얼거리면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리고...그들은 보았다.


공원 입구에서 걸어들어오는...한명의 여자를.


그녀는 붉은색의 자켓을 몸에 걸치고 있었다. 청자켓을 두른채 의자에 앉아 있는 최강희와는 정반대의 이미지였다. 하지만, 둘이 자매라고 해도 꼭 어울릴만큼, 그녀는 강희와 왠지 모르게 닮은 구석이 얼굴에 가득했고, 대단히 예뻤다.


".............."


세 사람은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채 그 여자를, 자기들 또래로 보이는 여학생을 보고 있었다.


여학생은 천천히 걷는 듯했지만, 어느새 거의 그들의 지척에 다다라 있었다. 그녀의 오른 손에는 갈색의 술병 하나가 들려져 있었고, 입가엔 옅은 미소가 피어올라 있었다.


"...누...누구....세요?"


정안은 눈길을 떨면서 상대에게 물었다. 분명 저 여학생은 자신들에게 용무가 있는 듯했다.


여학생은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띄고 있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청아하게 울리는 듯한, 맑은 목소리가 그들의 심신을 관통했다.



"....친애하는 이를 혹여 볼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시간의 법칙을 무시하고 이 나의 의지를 담아 인연될 걸음을 하였는데.......한가로이 주향을 논하고 음미할때가 아닌듯하네.....후훗~"



"................"



상당히 색다른, 이색적인 말투를 흘리는, 머리가닥 끝이 웨이브로 말아져 있는 여학생. 그녀를 보면서 세 사람은 다시 멍해졌다.


쓰윽


그녀는 어느새 정안과 강희의 바로 앞까지 다가 왔다. 그리곤 잠든듯이 눈을 감고 있는 강희의 얼굴을 유심히 보다가 약간 인상을 쓰면서 미소지었다.


"아유 이런....깊이도 틀어박혔네....흠....너답지 않게.......혼자 나오기란 어렵겠어. 도와주어야겠는걸?"


여자애는 강희가 앉아 있는 벤치의 맨 가쪽에 앉더니 제일 구석에 술병을 내려놓고 나서는 강희의 머리를 손으로 이끌어 부드러운 동작으로 자신의 무릎에 눕혔다.


정안과 유정, 한웅은, 그때까지도 멍히 넋놓고 있다가 핫 하고 환상에서 깨어난듯하더니 그녀의 행동을 보곤 놀라 눈을 부릅떴다.


"도..도대체? 누구세요? 강희 누나랑 아는 사이에요?"


정안이 급히 물었다. 여자애는 말을 급하게 내뱉는 남학생을 시야에 담더니 배시시 웃으면서 물었다.


"너 혹시....니가...강희한테 특별했다는....그?"


"? 무슨 말씀이세요?"


정안은 알아들을수 없는 말인지라 재차 물을 수밖에. 여자애는 자기 혼자 질문하더니 혼자 고개를 끄덕이면서 수긍하는 듯했다.



"흐응~ 쿡쿡. 맞구나 맞아. 딱 보면 알지. 너 맞네"


"무...무슨 말을...."


무슨 말을 하는거냐고 질문하려 했지만 그는 다시 제지를 받았다. 상대가 갑자기 검지손가락을 휙 하고 붉은 입술에 가져다대면서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기 때문이다.


"쉬~잇! 조용히 해. 간단히 말할께. 보아하니 열일곱쯤 되보이네. 내말 맞지? 맞다 아니다만 대답해"


"..네"


정안은 고개를 얼결에 끄덕였다. 여자애는 눈길을 돌려 한웅을 보고, 유정도 역시 살폈다.



"흠...남자애 쪽은...열일곱. 그리고 그쪽은, 나랑 같은 나이정도로 보이네. 뭐 어쨌건. 난 열여덟이니까 바로 말 놓을께. 괜찮지?"


"....어......"


유정이 멍한 시선으로 말했다. 여자애는 그런 그녀를 배시시 웃으면서 보다가 말했다.


"자~ 잘 들어. 너흰 모두 강희의 친구 아니면 학교 후배들인가보구나. 뭐 어쨌건, 나도 얘 친구야. 원래 난 만든 인연이 아니고, 자연스레 이루어지는 만남을 좋아하지만...왠지 이 친구가 너무 보고 싶어 오늘 와봤어. 볼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있었거든? 암튼간에....너희한테 부탁할게 있어"


"뭐..뭔데요?"


셋다 침을 삼킨 후에 정안이 대표를 해서 물었다. 여자애는 씨익 웃더니 말했다.


"지금 내가 보기에...강희가 무척 상황이 안 좋거든? 이대로 두면 죽어"


"!!"


셋다 무섭게 긴장했다. 여자애는 셋이 잔뜩 긴장한 표정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그래서...내가 지금부터, 강희를 구할거니까...너희들이 잘 지켜봐주고....공원에서 시답잖은 녀석들이 찝적대면 잘 지켜줘. 알았지?"


상대가 꼭 어딜 갈듯이 말하자, 세 사람은 인상을 찌푸렸다.


이번엔 유정이 물었다.

"..무슨 소리야? 지켜달라고? 넌 뭘 할려는 거야?"


여자애는 생글거리면서 말했다.


"강희는 지금....자폐현상을 겪고 있어. 마음 속에서 혼자 떨고 있는 듯해. 내가 가서 구할 생각이야. 그러자면...나도 이 애 맘속에 동화되어 들어가야 해. 그럼 그동안 나의 의식은 여기에 없게 되지. 그러니까, 그 사이에 너희 셋이서, 우리 둘을 잘 지켜달라는 거야. 알았지?"


세 사람은 완전 넋나간 표정이 되었다.


한마디로 지금, 무슨...유체이탈을 하겠단 말로밖에 안 들리니, 순간 세 사람은 이 여자애가 돌은거 아닌가 하는 생각밖에 안되었던 것이다.


정안은, 이런 여자한테 강희를 맡기면 위험하지 않을까 싶어 손을 뻗으면서 제지를 하려 했다. 그때.



화라락


화끈



"!!으흑!!"


정안은 뻗으려던 손을 움츠렸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몇발자국 뒤로 확 물러섰다. 비교적 뒤쪽에 있던 한웅과 유정까지도 열기를 느꼈는지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뭐지...? 불꽃?.....뜨거워...."


세 사람이 경악한 가운데, 여자애는 배시시 웃으면서, 그들만 믿는다는 듯이 한마디 했다.


"그럼..부탁해~"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 무릎 위에 머리가 올려진 강희의 이마에 오른손을 올리곤 눈을 감았다. 그녀는 눈을 감고 나서는 약간 난처한 미소를 지으면서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에휴.....그 녀석이 눈치채면 안될텐데.......어쩔 수 없지...."








그걸 끝으로, 그녀는 그렇게 미소띈 듯한 표정으로 동작을 멈췄다.


"............."



세 사람은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리곤 그렇게, 편안히 잠든 표정의 두 여학생들을 지켜보았다....







강희의 마음속에 들어온 그녀는, 강희의 심층계 끝에 있는 그녀의 기운을 느끼고는 그리로 하강하듯이, 깊이, 더 깊이 앞으로 나아갔다.


이곳은 의식의 세계. 마음의 세계. 가장 이상적인 세계이다.


때문에 그녀의 모습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식체를 강희의 몸속에 지닌 가장 어두운, 단층의 끝자락에 마침내 도착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새까만 하늘, 어둠으로 만들어졌다고밖에 생각할수밖에 없는 암흑, 그리고, 그 깊이와 넓이를 짐작할수 없을만큼 거대한 바다. 푸른 바다였다.



쿠쿠쿠..


촤아아~~



여자애는 휘익 하고 한번 휘파람을 분 후에 감상을 피력했다.


"이야아~~!! 대단한데? 보통 사람이라면 이렇게 넓은 자의식을 가질수도, 느낄수도 없을 텐데. 이만한 심층영역이라니....후훗~ 역시 내 친구는 대단해~~"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강희가 어디에 있나 하고 그녀가 느껴지는 기운을 따라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강희를 찾았다.



"!!"


얼음 감옥. 그렇게밖에 표현할수 없는, 거대한 정사각 모양의 우리 안에, 자신의 친구가 있었다.


그녀는 팔 다리가 온통 철저히 결박되어져 있었고,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눈가엔 눈물이 그득했다.


"후...이런.....좀만 더 늦었어도.....다행이다. 빨리 구해야겠어"


그녀는 휙 하고 몸을 띄워 올려 앞으로 쌩 하고 날아갔다. 그때...


"응?"



수면이 갑자기 용트림치듯이 흔들리기 시작하면서 바다가 포효하는듯했다.


여자애는 중얼거렸다.



"뭐야 이건? 왜이리 소란스러워?"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어디선가 말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넌 누구지? 어떻게 여기를 왔지? 여기는 최강희하고 나밖에 존재할수 없는 곳인데?"


목소리의 울리는 듯한 음성을 듣다가 여자애는 고개를 갸웃대더니 물었다.


"흠...넌 강희가 만들어낸 심층의 한 자락이구나? 흥미로운걸? 자아의 이성인가?"


자신의 정체에 대해 단박에 파악하는 여자애가 놀랍다는 듯이 상대는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생각났다. 지난번 공원에서 강희하고 한번 만난 여자애구나 너. 뭐 어쨌건....어떻게 여길 왔는지는 몰라도 그냥 얌전히 물러가. 최강희는 내꺼니까"


여자애는 눈썹을 꿈틀했다.


"강희의 심층 일부에 지나지 않는 존재인 주제에, 본연의 이성을 갉아먹으려 들어? 엉뚱하기 그지없는 이성이네?"


그러자 자아의 이성이 코웃음을 친 후에, 말했다.


"자~~ 최강희. 쉬는 시간은 끝났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최강희의 온 몸에 세찬 수류와 얼음결정이 휘돌기 시작했다. 잠시동안 그녀의 몸을 감싸듯이 돌아다니던 그것들은 이윽고 처절하다 싶을만큼, 강희의 온 몸을 유린해대기 시작했다.



촤자자자!!


바가가각~


강희는 그때까지도 거친 숨결을 내쉬다가 다시 아악 하고 비명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끼야아아아악~!! 아흐흐흐흐흐~~으꺄하하하하하하하~~~~!!"


강희의 괴로움에 찬 웃음소리를 듣다가 여자애는 약간 진저리를 치더니 말했다.


"쳇....완전 고문을 받고 있었잖아? 빨리 구해야겠어"


그러면서 그녀가 앞으로 쓰윽 나서려 하는데 갑자기 바다 자체가 부상하는게 아닌가 싶게 엄청난 물보라가 휘몰아쳐 올랐다.



쿠카카카


콰과과과



" ? 뭐야? 날 막을 셈이야?"


여자애가 전혀 당황하지 않은 표정으로 허공의 아무 곳에나 시선을 둔채 목소리에게 묻자 자아의 이성이 까르르 웃더니 말했다.


"당연하지. 최강희는 나의 것이야. 저 앤 M 속성이라구. 저렇게 괴로운 듯 웃지만, 은근히 즐기고 있어. 잘 들어봐. 웃음소리가 광란적이지 않아? 이히히히 하고 웃는듯하지? 킥킥. 아무튼 최강희는 계속 저렇게 웃어야 해. 그러니 구할 생각일랑 마. 어림도 없어. 내가 있는 이상엔."


여자애는 자아의 이성의 말을 듣고 있다가 키득거리더니 조용히 읊조렸다.


"어림없다....어림없다고? 우후후....내가 하는 일인데...어림이 없어?"


그녀는 말을 마치면서 오른손바닥을 아래로 내려 바다 쪽으로 향했다. 그리곤 짧게 말했다.



"폭염"


화라락

쿠아아아아


진홍빛을 가득 머금은, 직경이 수십미터에 이르는 불꽃의 광주가 순식간에 뻗쳤다.


콰카카카카카-----!!!


와드드드드드!!


치이이익 치지지직!!


엄청난 크기의 불기둥이 바다에 내리꽂히듯이 뚫고 들어가고 난 후에, 하해와 같이 넓던 바다를 짓이기고 증발시키기 시작했다.


자아의 이성은 깜짝 놀란 듯이 중얼댔다.


"뭐..뭐야!! 넌 뭐야?"


여자애는 대답해줄 용무는 없다는 듯 키득거렸다.


자아의 이성은 당황한 듯하다가 다시 여유를 되찾은 목소리로 말했다.


"흥...대단하긴 하지만....나의 영역은 상당히 넓어....그정도 가지고 이 바다를 다 증발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어림도 없어...킥킥...."


여자애는 자아의 이성의 말을 듣고 나더니 또다시 키득거렸다. 그렇게 잠시동안 계속 웃고 있는 그녀의 몸에...변화가 일어났다.


화르르르르~


"!!"


자아의 이성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뭐지?"


여자애의 몸이 붉게 변하고 있었다. 긴 머리카락은 새빨갛게 달아오르듯이 변하더니 하늘로 솟을듯이 솟구쳤고, 눈썹도 붉게 변해 뻗쳤다.


거기다가 눈동자까지 이글이글 타오르는듯한 모습으로 화하여, 마치 홍옥이 박힌 듯했다.

"뭐야...도대체...넌...."


자아의 이성이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그렇게 붉은 모습으로 변한 여자애가 다시 오른손을 바다 쪽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연화륜"


그녀의 말이 끝나자 마자 손에서 붉은 연꽃 송이가 하나 나와 바다로 떨어졌다. 그것은 처음에는 조그맣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시계방향으로 서서히 돌기 시작하더니, 맹렬히 타오르기 시작하면서, 이루 말할수 없이 커져 갔다. 그 지름을 짐작하기가 힘들만큼.



화르르르르르르르~~!!!


촤아아아아아아!!



바닷물이 엄청난 속도로 증발되면서 줄어들고 있었다. 그 연꽃 모양의 화염은 수레바퀴처럼 엄청난 기세로 휘돌며 바닷물을 몽땅 증식시킬 셈으로 움직여대고 있었다.



자아의 이성은 비명을 질렀다.


"그..그만해!! 하지마!!"


하지만 여자애는 키득거렸다. 그녀는 자아의 이성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이번에는 시선을 돌려 강희가 붙잡혀 있는 얼음 감옥을 쳐다보았다.


"꺄하하하!! 아흐흐흐하하하~!!!"


최강희는 그때까지도 전신에 간지럼을 당하면서 고통받고 있었다. 여자애는 결빙의 우리에 손을 뻗었다.



"멸"


그녀의 한마디에, 얼음 감옥이, 마치 태양빛을 받은 듯이 무지무지한 속도로 녹아들기 시작했다.


치지지직

치이이이~!!


자아의 이성은 이젠 울상이다 시피 되어서 비명만을 질러대었다.


"아..안돼!! 최강희는 내꺼야!! 나만이....나만이....."


하지만 자아의 이성은 끝말을 잇지 못했다. 최강희를 괴롭혀 대던 수류의 흐름이, 얼음들이 녹아들고 증발하면서, 힘을 잃어버리기라도 한듯, 자아의 이성은 자취를 감추었다.


여자애는 방해물이 사라졌다는 듯, 빙긋 미소지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상을 살풋 찡그렸다.


"어라..."


최강희를 괴롭혀 대던 얼음송곳과 물줄기는, 자아의 이성은 사라졌지만, 이상하게도 아직까지 녹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있었다.


바로 최강희의 몸을 결박하고 있는 구속물들이었다. 그녀의 등허리와 사지를 견고하게 얼려서 붙잡애 매놓고 있는 얼음 기둥들. 그리고 손가락과 발가락까지를 모두 묶고 있는 수정의 실끈같은 것들.


그것들만이 유독 남아서 강희를 붙잡아놓고 있었다. 여자애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분명 저것들까지 타겟으로 삼았는데....."


여자애는 어쨌건 일단 최강희와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느꼈다. 최강희의 의식을 돌려놓으려면, 저 유체를 몸에 다시 덧씌워야 하니까.


휘이잉


그녀는 날아올라서, 온몸이 결속된채 누워 힘든 숨을 몰아쉬는 최강희에게 다가갔다.


"헉헉....헉...."


눈을 감고 있는 강희의 눈가엔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고, 양 볼이며 콧가는, 너무나 차가운 것들에 시달려서인지, 창백하다기보다 오히려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여자애는 안쓰러운 듯이 강희를 바라보다가 오른손으로 강희의 젖은 이마를 쓸어주었다.


"아...학...."


강희는, 따뜻한 손길에, 온기에 퍼뜩 놀라서 흠칫거리더니 눈을 떴다. 여자애는 강희의 눈을 보면서 애잔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바보야...여기서 뭐해?"

"너...넌....."


강희는 놀란 시선으로 여자애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 여자애는 자신이 일전에 한번 만났던 친구였다. 마음이 아주 잘 통하는 소중한 친구. 하지만 지금 그 친구의 모습이 상당히 이색적인지라 많이 놀란 것이다. 마치 만화책에서나 나올 듯한, 환상적이기 이를 데 없는 모습으로. 매력적인 붉은 눈동자을 지니고 타는 듯이 붉은 눈썹과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자신의 친구는 자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희가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데 여자애가 싱긋 웃더니 말했다.


"이곳은 심층계, 본연의 모습이 내비치게 되는 자리....이게 나의 원래 모습이야. 그리 놀랄 것 없어"


강희는 아아...하면서 놀란 듯한 기색이었지만, 너무 지쳐 있어서인지, 그녀를 바라만 볼뿐 더 이상 말이 없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여자애가 말했다.


"모두들, 널 기다리고 있어. 애타게....이러고 있음 안되지 않을까? 너답지 않아"


강희는 여자애를 보면서 눈물을 주르륵 흘렸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소...소용없어.....난...느낄수 있어...이번엔....못 빠져나와.....이 얼음의 결정들은.....나의 심층이 만들어낸것 중에서...가장 견고한 것들인것 같아...."


여자애는 인상을 찌푸렸다.


"이딴건 니가 만든게 아냐. 자아의 이성이 만든거야"


강희는 슬쩍 미소지었다.


"...그...그 애 또한....분명히 나의 한 부분이야...어...어쩌면 난....이런 상황을 원했을지도 몰라....."


여자애는 약간 화가 난 듯 씩씩대다가 인상을 찡그리며 강희에게 물었다.


"이게....니가 원하던....완벽한 구속이야?....그런거야?"


"..............."



강희는 힘겹게 눈을 뜨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여자애를 살폈다. 여자애는 무척이나 화가 나 있는 듯했다.


"겨우 이런 곳....이런 장소....이런 어줍잖은...시시한 것들이.....니가 말하던 완벽한 구속이야? 응? 정말로? 그래?"


".............."


강희의 눈동자가 간절해지는걸 시선에 담으면서, 부르르 떨더니 여자애는 말했다.


"넌....내가 인정하는.....내가 살면서 여태껏 봐 왔던 여자들 중 그 누구보다도 강한 여자야!! 강한 여자애야!! 이런 곳에서....쓰러질 니가 아냐!! 절대로 용납 못해. 인정 안해!! 정히 못 일어서면....내가 강제로라도 !! 이 구속물들? 부셔버린 후에 널 데리고 올라가겠어!!"


".............."


여자애가 거칠게 외치자 강희는 움찔거리면서 다시 눈물을 흘렸다. 여자애는 강희의 눈가에 묻는 눈물을 닦아주면서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예전에 내가...말했었지? 나 좋아하는 녀석이 한명 있다고.....그녀석이 싫어 도망쳤다고...."


"...으응...."


여자애는 과거를 회상하는 듯이 잠시 위쪽을 올려보면서 말했다.


"난...한번 제대로...그녀석에게 잡힌 적이 있어....그리고...그녀석에게...오랫동안...매만져졌지....후후....긴 시간이었어.....지금도 생생해...그때가....."


"............"


여자애는 다시 강희를 내려다보면서 이마를 쓸어주며 말했다.



"나도 긴 시간 동안...당해본 때가 있어서....너의 심정을 잘 알아....차가운 것에....너무 오래 고통받아서 그런거야.... 너무 오래 몸이 붙잡혀 있어서 그랬던 거야. 괜찮아. 잠시 겁먹었을 뿐이잖아? 잠시 움츠렸을 뿐이잖아? 다시 일어설수 있어. 과거에도 분명, 이런 일이 있었지? 그리고 일어섰지? 좋아 그럼. 된거야. 또 할수 있어. 내가 도와줄께. 지켜봐줄께. 옆에 있어줄께.


포기하지마. 넌 할수 있어. 넌 나의 친구야. 내가 자랑스럽게 누구에게나 소개할수 있는 여자애, 최고의 친구. 그게 너야. 최강희. 날 실망시키지 마. 다시 일어서. 니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알았지?"


"....스스로...나의 의지로....."


강희가 중얼대었다. 여자애는 그녀가 용기를 잃을까 심려되는 듯이 다시 힘차게 말했다.


"그래!! 너의 의지로!! 얼마든지 해낼수 있어!! 내가 장담해!! 반드시 가능해!! 이런게 니가 말했던 완벽한 구속이라고 난 절대 생각지 않아. 무엇보다도!! 니가 이러고 있으면!! 널 소중히 여기는 부모님!! 친구들!! 그 외의 많은 이들!! 다 어쩔거야? 응?!!"


"...날...소중히 여기는....."


강희의 목소리에 점차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여자애는 재차 외쳤다.


"그래!! 그 많은 사람들!! 그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지마!! 그들을 슬프게 만들지 마!! 이건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자폐? 이런게 완벽한 구속? 절대 아냐!! 자기 자신도 못 이겨내면서 무슨 완벽한 구속이야!! 널 진정 묶어줄 누군가는, 따로 있을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바보 짓 그만해!! 넌 나랑 가야 해!! 이딴거 다 끊어버리고!!"


그렇게 말하면서 여자애는 강희의 온몸을 어루만졌다.


"...따뜻해.....따뜻해......."


여자애의 손길이 머무는 곳에 온기가, 열기가 퍼지는 것을 느끼면서, 마침내.....강희는 기운을 차렸다.



강희는 말했다. 그녀는 이제, 여느 때의 그녀로 돌아와 있었다. 패기 넘치는 모습으로, 티렉스 최강희로.


"고마워...니 덕분에...할수 있을 것 같아....."


여자애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좋아. 믿어보겠어. 지켜봐주지. 걱정마. 만약에 니 스스로 못 나올 시에는, 내가 책임지고 이 얼음기둥들을 박살내줄거야....다만 그렇게 하는 것보단, 니 스스로 만들어낸 이것들을, 역시 니 자신의 의지로 깨부시는게 좋으니까...그래야 후유증이 안 남을거야"



자신에게 기운을 북돋아주는 여자애의 말을 받은 후에, 강희는 기운찬 기합을 내질렀다.


"이야아압!!!"


부르르르...


그것들은 처음엔 꼼짝할 기세도 하지 않았다. 강희는 당황했다. 눈망울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을 바라봐주는 여자애를 시선에 담았다. 여자애는, 강희가 성공할거라는것에 대해 한치의 의심도 없는지, 여유가 넘치는 미소로 그녀를 바라봐주고 있었다.





강희는 재차 용기를 얻고는 다시 한번 기합성을 질렀다.



"에이잇!!"


쩍...


쩌적...


쿠드득


쿠드드득.....


끈들이, 기둥이, 부서지기 시작했다.....무너지기 시작했다.......


강희가 얼음의 구속물들을 부셔버리는걸 보면서 여자애는 외쳤다.


"됐다~!!"


강희는 그것을 끊어내는것에 온 힘을 다 쏟았는지, 헉헉대다가 지친 기색으로 눈을 감았다. 여자애는 강희를 부드럽게 품안에 감싸 안았다.






강희의 이마에 키스를 해주고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여자애는 말했다.


"고생했어....."


여자애는 강희를 한 팔로 품안에 안은 채 손바닥을 들어 하늘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생글 웃으면서 말했다.


"염화로"


그러자 붉은 화롯불들이 피어오르면서 폭죽같은 기세로 뿜어져 나가며 어두운 사방에 퍼지며 널리 널리, 넓게 넓게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여자애는 잠든 강희의 감긴 눈길을 보면서 말했다.


"축하해..."


강희의 잠들어 있는 표정은 평안하기 그지 없었다.








여자애는 눈을 떴다. 그리곤 일단 한숨을 푹 하고 한번 쉬었다.


"푸하하아~~....에고고. 힘들어...."


그녀는 그렇게 한숨을 한번 꺼져라 쉰 후에 고개를 들었다.


"!!!"


여자애는 순간 움찔 했다.


초롱초롱한 눈길들이, 기대를 가득 감은 눈길들이, 염원이 가득찬 눈길들이.... 세 쌍!! 여섯 개의 눈동자들이 자신의 눈이 뚫어져러 살펴보면서 감정의 파도를 실어왔기 때문이다.


"까..깜짝이야...."


여자애는 잘 놀라지 않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화다닥 놀란 자기 자신을 발견할수 있었다.


"어..어때요? 잘 되었어요?"


남학생 한명이 확 고개를 들이밀고는 여자애한테 질문을 던졌다. 여자애는 배시시 웃더니 오른 손 검지로 강희의 잠든 얼굴을 가리켰다.


"킥킥...글쎄에?~ 잘 안되었다면, 이렇게 입가에 미소가 걸렸을까 싶네?"


여자애의 말에 강희의 표정을 살피던 정안의 입이 함박만하게 벌어졌다.


"가..강희 누나..."


최강희가 웃고 있었다. 비록 아직 눈은 뜨고 있지 않았지만, 혈색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그리고, 미약하게만 느껴졌던 숨결이, 이젠 쌔근거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확연하게 느껴졌다.


주르륵


정안은 감격해서 처음 보는 여자가 눈앞에서 보고 있음에도 체면불구하고 주체할수 없는지 눈물을 펑펑쏟기 시작했다. 여지껏 마음고생한것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다.


"으흑....으흐흑....!!"


정안은 눈물을 정신없이 쏟으면서 두 팔로 눈자위를 닦아 대었다. 그런 그를 보는 한웅도 눈가에 눈물이 핑 하고 맺혔고, 여자인 유정은 말할 것도 없었다.


유정은, 강희의 안색이 원래대로 된것을 보면서, 다행이야..다행이야 하고 중얼대다가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으아앙 하고 어린애처럼 울기 시작했다.


"으흑...으아앙...미안해...강희야 미안해........"


순식간에 울음바다가 된 공원. 하지만 공원에는 오로지 다섯 사람뿐이어서 그런가 누구 눈치를 볼 필요는 없었다.


주체할수 없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자신에게 고맙다고 연신 말하는 정안에게, 여자애는 피식 웃더니 그의 손목을 잡았다.


터턱


"?"


여자애는 어리둥절해하는 정안을 자신 앞까지 당겨오더니, 다른 팔로는 강희의 상체를 전혀 어렵지 않게 일으켜 세우면서, 자신과 자세를 바꿀 것을 권했다.


"어..."


정안이 얼떨떨해 하면서 멍히 있자, 여자애가 핀잔을 줬다.


"나보고 설마, 밤새도록 간호를 해달라는건 아니겠지? 지금부턴 너의 몫이 아닐까?"


"..아...."


정안은 신음하더니 다시 고개를 조아렸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연인을 회복시켜준, 되살려준 사람인 것이다. 감사한 마음이 없을래야 없을수가 없었다.

"다..다시 한번....정말 고맙습니다....."


여자애는 생글거리더니 결국 그와 자리를 바꾸었다.


강희의 머리를 무릎에 눕혀보고 난 후에, 정안은 완전 두근거리는 심정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두근 두근..


"가..강희 누나가....내 무릎에서..."


그는 심장이 터질 듯했다. 그러자 볼이 붉게 피어올랐다. 여자애는 그의 볼가에 떠오른 붉은 빛깔을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아름다운 색이군....."


"..예?"


강희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던 지라 진정안은 제대로 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여자애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말했다.


"강희 걱정은 마.. 시간이 지나면 깨어날 거야. 아무 일 없이. 후유증도 없을 거고. 후훗."


"저..정말...감..."



다시 한번 감사하려고 했는데 여자애는 검지손가락을 샥 하고는 자기 입술에 가져다 대더니 아무 말 말라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다.


정안은 그런 그녀의 행동에 멋쩍은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여자애는 일단 정안과 강희를 그렇게 붙여둔 후에, 뒤를 돌아봤다.


한유정이 공원 바닥에서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채 계속 엉엉대고 있었고, 김한웅은 그런 그녀를 달래느라 무진장 애를 먹고 있었다.

"킥킥...."


여자애는 생글거리더니 오른 손에 술병을 들고는 타박 타박 걸어서 유정 쪽으로 다가왔다.


"...에?"


계속 펑펑 울음을 토하고 눈물을 쏟아대던 한유정은 무릎을 굽힌 후에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여자애가 시야에 들어오자, 그런 소리를 내었다.


여자애는 한유정의 젖은 눈길을, 눈동자를 들여다보다가 생긋 웃더니 말했다.


"정말로 100퍼센트 꾸밈이 없어...완전무결한 눈물이야..너..진짜 순수한 영혼을 가졌구나...복 많~~이 받겠어...후후..."


"...무슨..."


유정은 말을 이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쓰윽



여자애는 왼손 검지손가락으로 유정의 목덜미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


유정은 정신이 핑- 하고 멀어지는것을 느끼면서 호수처럼 젖은 눈을 감았다...



비틀



유정이 몸을 쓰러뜨릴 듯하자, 여자애가 얼른 유정을 받쳐들었다. 한웅이 놀라서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그녀가 생글거리면서 얼른 해명했다.


"걱정마. 잠들었을 뿐이야. 감정이 너무 격해진 듯해서 내가 재웠어. 지금 이런 심리상태여봐야 하등 이로울 것이 없거든. 킥킥..."


한웅은 가슴을 내리쓸면서 고개를 숙였다. 덩치가 산만한 녀석인지라 허리를 절도 있게 굽히니 씩씩한 모습이 넘쳐 흘렀다.


"정말 고맙습니다 누나"


여자애는 허리를 굽힌 그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그러다가 술병을 오른손에 든 채로 갑자기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갑자기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안과 한웅은 이름을 물으려고 소리쳤다.


"강희 누나 친구라고 하셨죠?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가르쳐 주고 가시죠"


하지만 여자애는 뒤도 안돌아보면서 멀어져갔다. 그녀는 다만 이렇게만 말했다.


"너희들이 가슴속에 품고 사는 여자가....힘겨워할때, 울고 있을때, 주저앉아 있을때....껴안아주어라. 위로해 주어라. 보듬어 주어라....그렇게 해주어라...항상....."





"................."


두 남학생은 멍한 시선으로 그 여학생의 뒷모습만을 바라보았고, 그렇게 그녀는....사라졌다.









<여왕의 눈물>



한웅은 잠들어 있는 유정을 바래다주어야 했기에, 강희를 업은 정안을, 강희의 자취집 앞에서 차로 내려주면서 말했다.


"야, 믿고 간다. 강희 누나. 몸조리 잘 해줘. 알았지?"


꿈틀


"...뭘 믿고 간다는거냐?"


한웅의 은근한 시선을 받으면서, 이마를 빠직 거리며 정안은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한웅은 큭큭거리더니 말했다.


"야...강희 누나 아니냐. 내가 걱정이 안 되겠어? 아무 짓 말라고...알았지? 친구로서 믿는다. 진짜"


"한마디만 더 하면...."


한웅은 이크 하더니 그럼 내일 보자 하면서 멀어져갔다. 한웅이 가기 직전에 정안이 덧붙였다.


"오늘은 좀 늦은 듯하고..옷은 내일 줄께"


"그래. 알았다. 임마. 하하"


그렇게 한웅과 유정을 보낸 후에, 정안은, 강희의 옷속에 들어 있던 집 열쇠를 꺼내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딸캉


".............."


강희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방 안. 또 다시 자신의 머릿속을 황홀하게 만든다.


"...두번..째구나..."


최강희의 자취집을, 한번도 아니고, 두번씩이나 온 진정안. 대한민국 최고의 행운아인 녀석임에 틀림없다.



풀썩


잠들어 있는 최강희를 침대에 부드럽게, 그리고 조심스럽게 눕힌 후에, 정안은 그녀의 손목을 꼬옥 쥐었다.


"....힘들었죠?....."


강희 누나한테선 대답이 없다. 아무래도 너무 지치고 피곤한 듯, 노곤한 듯...그녀는 쌔근거리는 숨을 내면서 예쁜 자태로 잠들어 있을 뿐이다.


"이렇게 예쁜 누나가.....세상에서 가장 강하고....또.....그 고통....."


정안은 머릿속이 복잡한지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눈물을 또 몇방울 떨구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핸드폰을 꺼내들곤 집에 전화를 했다.


뚜우우

뚜우우


딸칵


"네, 여보세요?"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은 정안은 바로 용건을 말했다.


"어머니. 전데요. 저 오늘....죄송해요. 집에 못 들어 갈것 같아요....."










어머니한테 크게 한 소리 들은 정안. 하지만 기분은 아무렇지도 않다. 아니, 오히려 벅찬 희열이, 즐거움이, 행복함이, 그의 눈길을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고, 가슴을 달아오르게 하고 있었다.


꾸욱...꾹...


정안은 오늘 집에 들어가지 않을 작정이었다. 그는 지금, 침대에서 잠들어 있는 강희의 몸에 이불을 덮어주고는, 종아리 부분만 걷어낸 채, 정성스레 발을 안마하고 있었다.

강희의 발바닥 가운데를 눌러주면서..


꾹꾹..


정안의 오른손은 강희의 왼발목을 잡고 있었다.


진정안에겐 능력이 또 하나 있었다. 자고 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 사람의 발목을 잡은 채로 있으면, 대상이 결코 수면에서 벗어날수가 없는 능력이었다.


물론 진정안이 그것까지 아는 건 아니었다. 해본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그럴 것이라는 확신, 예감이 그에겐 있었다.


어쨌거나 그의 능력은 무력화이니까. 수면을 취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심신이 가장 늘어져 있을 때이다. 그런 상태일때의 상대의 발목을 잡는다면, 상대는 깨어나지 못하거나, 그도 아니면, 설령 깨어난다 해도, 곧바로 잠들어버리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온 몸에 힘이 하나도 없으면, 졸음이 오는 것이 사람의 심리이니까.


진정안이 최강희의 발목을 잡고서 발바닥을 안마하는건 이유가 있었다. 최강희의 성격상, 그녀가 깨어나면, 이젠 다 잘 풀렸다고, 아무것도 아닌 일이라면서 그냥 돌아가라고 할 가능성이 없잖아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런 가능성이 분명 있을것이라고 생각하는 진정안이기에, 지금 이 시간이 소중했다.


강희가 당분간 못 깨어났으면 싶었다. 편안한 숙면이 되게 도와주고 싶었다. 그녀의 심신을 달래주고 싶었다.


마음만 같아선 그녀의 온 몸의 근육을 풀어주고 싶고, 어루만져주고 싶었지만, 그건 명백히, 강희 누나에 대한 예의가 아닐 듯싶었다.


그래서 진정안은, 이것저것 다 때려치고, 강희의 발바닥을 중점으로, 자극해주면서, 깊은 잠을 잘수 있게끔 유도해보려 한것이다.



꾹꾹


정안은 강희의 발을 어루만지면서 슬쩍 강희의 얼굴을 보았다. 강희의 입가엔 그림같은 미소가 살짝 맺혀 있었다. 편안한 숙면을 이루는게 틀림없었다.


"다행이에요...강희 누나...."


그는 힘든 줄 모르고 밤새 강희를 안마 했다.... 새벽 내내.........











다음 날.



삐리릭 삐리리


시계의 알람이 울리는것이 귀에 들리자, 강희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시계의 알람을 정지시키고는 부시시 일어나서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여긴...."


집. 틀림없는 자신의 집이다. 어떻게 된 걸까. 자신은 여왕한테 잡혀 있던 게 아니었나.


"........!!!..."


잠시 생각을 하던 강희는 모든 게 떠올랐다.


"...그래 맞아....경계식을 발동했었지........그리고는.....난 자아의 이성을 만나고.....그랬다가......."


심층계에서 있었던 일들이 모두 생각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자신을 구하려고 와주었던 그 여자애가.....강희의 마음 속에 떠올랐다.



"하아......"


강희는 한숨을 한번 쉰 후에 피식 하고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고마워.....정말.....고마워...."


여자애를 떠올리면서 강희는 고맙다는 말을 연신 읊어댔다. 그렇다면....어떻게 된걸까? 그 여자애가 여왕과 박사로부터 자신을 구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득...그녀는 자신의 후각을 자극하는것이 있음을 느꼈다.


".....라면?"



라면. 라면냄새가 방안에 가득차 있었다. 그녀는 어리둥절해하면서 고개를 돌려보았다.


"..어?"



라면이 놓인 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렇게 오래 된것도 아닌 듯, 약간의 김까지 냄비 표면 위에 서려 떠도는 그것이, 있었다.


"...뭐지?"


강희는 놀라서 이불을 확 걷어치웠다. 그리고는 상으로 다가갔다.


상에는, 예상대로 차리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듯한, 계란이 멋들어지게 풀어져 먹음직스레 되어져 있는 라면, 그리고 젓가락과 물컵. 생수통이 놓여져 있었고, 상의 구석에 왠 조그마한 쪽지도 한장 있었다.


"?"


강희는 라면도 라면이지만, 쪽지의 내용이 궁금해서 접혀져 있는 그것을 펴들었다. 쪽지의 내용은 상당히 간단했다.



<발바닥을 보시오>


"...?"


강희는 이게 뭔말인가 싶었다.


"...발바닥을 보라고? 내 발바닥?"


강희는 얼른 엉덩이를 바닥에 깔고 앉아서 양반다리 자세를 취했다. 그러자.....



"..............;;;;;;;;;;"


강희의 이마에서, 뺨에서, 땀이 삐질삐질 새어나왔다.


그녀는 외쳤다.


"뭐..뭐야!!"


자신의 발바닥이, 까맸다. 새까맣게, 무언가가, 써져 있었다. 자신의 발바닥은....메모장이 되어 있었다.


"도...도대체..."

강희는 그걸 읽기 위해 유심히 자신의 발바닥을, 두 발바닥을 번갈아 봐가야 했다. 글의 내용은 왼쪽부터 시작되었다.



<ㅎㅎ 잘 잤어요 강희 누나? 이걸 읽고 있을 때쯤 누나는 크게 놀랐을 거에요? ㅋㅋ 어때요? 저 발바닥에도 글씨 잘 쓰죠? 누나가 피곤하긴 진짜 피곤했나봐요. 하이테크로 쓰는데도 콜콜 잘 자드라구요. ㅎㅎ . 뭐 어쨌건 제가 말하고 싶은건요. 참 여러가지지만....간단히 말할께요. 앞으론 사람 걱정좀 시키지마세요!! 누나때문에 제가 얼마나 가슴졸였는지 알기나 해요?! 유정이 누나도 펑펑 울었다구요!! 한웅이두요!! 학교에서 만나면..각오하셔야 할거에요. 어쨌건 학교에서 보구요. 상 제가 좀전에 차린거니까, 맛나게 드세요. 집에 할게 라면밖에 없더라구요. 하여튼 이만 쓸게요. 그럼 이따 봐요 누나!!> -진정안-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른발의 뒷꿈치에 동그랗게 풍선마냥 그려진 p.s가 있었다.


p.s: 누나 사랑해요!! 근데..발은 좀 씻으시죠!!



"..............."


최강희는 잠시 무표정으로 있다가, 젓가락을 오른손에 확 들더니 라면을 후르륵 입안에 밀어넣으면서 씹어뱉듯이 말했다.


"각오는 니가 해야겠지.....이자식이..........."







라면을 후딱 먹어치운 후에, 자기 발을 자기가 닦는데도 간지러움에 몸부림 칠정도로, 타월로 발바닥에 글씨를 박박 지운 후에 최강희는 눈물을 약간 글썽이면서 학교로 등교를 했다. 이를 갈면서....


학교에 가자마자 한유정부터 찾은 최강희는, 유정이를 재빨리 붙잡으면서 물었다.

"유정아? 괜찮어? 다친 데 없어? 응?"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그런 짓거리를 자신에게 했는데도 몸걱정부터 하는 안부를 물어 오는 최강희를 보면서, 유정은 눈물이 얼굴에 핑 하고 맺힘을 느꼈다.


"가..강희야...미안해...흑...."


그 말 한마디로, 유정이 확실히 매혹안으로부터 벗어낫다는 것을 깨달은 최강희는, 약간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그녀의 어깨를 어루만져주었다.


"에이...됐어...니가 그러고 싶어 그런게 아닌걸.....나도 한번 당해봤는데....매혹안이던가?...그거 정말 장난 아니드라...헤헤...."


수업이 시작 되기 전에 유정을 이끌고 옥상으로 간 강희는, 어제 있었던 일에 대한 전후사정을 모두 그녀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경계식에 들어 자폐인이 되다시피 한 자신을 보더니 진정안이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통곡을 했다는 대목에서는, 강희는 눈을 둥그렇게 뜰수밖에 없었다.


"뭐어? 그녀석이 진짜...그렇게나 울어댔어?"


유정은 손사래까지 치면서 말했다.


"그럼. 장난 아니었어. 나보다도 정안이가 더 울었을걸? 완전 주위 눈치도 안보면서 막 왁왁 하고 울더라"


"...그녀석이....음....."


강희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러다가 그녀는 다시 한번 유정의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어쨌거나 정말 다행이야. 난 진짜로...널 잃는 줄만 알았다니까"


유정은 계속 자기만을 신경써주는 강희의 모습을 보면서, 목소리가 또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그런 말 하지마....나때문에 니가 그런 꼴 당한 걸 생각하면...난 정말.....난....."


유정은 계속 몸을 떨어댔고, 강희는 배시시 웃으면서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줬다.


그때쯔음....


"어?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있네요 강희 누나? 하하"





최강희가 고개를 돌렸다. 거기엔 진정안과 김한웅이 활짝 미소지은채 서있었다.


빠직



최강희의 이마에 실핏줄이 떠올랐다. 그녀의 머릿속에, 아침에 있었던 일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진정아안...."


움찔


정안은 순간, 자신이 어마어마한 누나를 상대로,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렀었다는 일을 상기했다.


"아..아하하...누나.....라면은 맛있게 잘...먹었죠?"


".....너 이자식......"


강희가 거기까지 말하면서 바들바들 떠는데 김한웅이, 지혼자서 얼굴이 질리기 시작하더니 진정안을 보면서 말했다.


"너...너 설마!!"


진정안은 이야기가 이상하게 진행되자, 비장의 수를 써먹었다.


울먹


"...?"



강희와 한웅은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진정안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진정안은 목소리를 떨면서 말했다.


"저..정말 다행이에요 강희 누나....역시 아닌 척 하려 해도...힘이 드네요....누나가 무사해서 전 정말.....으흑....."


"!!!"


막상 진정안이 저런 식으로 나오자, 최강희는 난감함이 엄습함을 느끼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이런...."



진정안도 남자다. 남학생이 저렇게, 울먹거리면서 말을 하자, 없을 것 같이만 느껴졌던 강희의 마음속에서, 모성애, 보호 본능을 일으켰다. 물론 그렇다고 가까이 다가가서 막 어루만져주고 싶은 심정이 들정돈 아니었지만, 측은지심이 발동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번엔 강희가 쩔쩔매면서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야야....됐어...뭘....사내 녀석이 질질 짜기나 하고.....아하하....그만 해라 그만 해....내가 졌다 졌어...."


강희는 낭패의 빛을 여실하게 비치면서 그렇게 정안을 달래는 분위기가 되어져 갔고, 강희의 약한 면모를 보는 유정과 한웅은 키득거리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정안은 겉은 울상이었지만, 속은 자신의 작전이 잘 먹혀들어가는걸 확인하면서 내심 쾌재를 부르는 중이었다.


"크크...역시 강희누나는 속마음이 약하다니까....으흐흐......"


작전이긴 했지만, 어제 일만 조금씩 상기해봐도, 자기 눈에서 눈물 아니라 피눈물까지도 흘리는건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니었으니까...그의 진심도 어느 정도 작용한 것도 있다.


어쨌건 그렇게 정안이를 내내 달래주다가 수업 시작 전에 유정과 옥상에서 내려오면서 강희는 뒷머리를 긁으며 중얼대었다.


"에....이게 아닌데......"







일주일 후



그 사건이 있은지가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동안 제법 많은 일이 있었다. 최강희와 한유정은, xx탕을 한번 더 방문했다.


닥터 솔이 진정안한테 했다는 말, 참회의 심정으로 최면에 걸린 이들을 모두 해방하고, 뒷수습을 모두 그가 떠맡겠다는 말, 그걸 정안이한테 전해들은지라, 최강희와 한유정은, 일단 xx탕부터 살펴보려 간 것이다. 뭔가 변화가 있는지.


가보니까, 임대가 났다는 글만이 붙어 있었다. 정말 닥터 솔이 뒷수습에 나선 모양이라고 둘은 짐작했다.


유정은 아직도 약간 마음이 불안한지, 강희의 팔을 꼭 여미면서 바짝 붙으며 물었다.


"어디 딴데 가서 또 그런 짓을 하는거 아닐까?..."


강희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 거야....내가 직접 부딪혀봐서 아는데....그런 사람들일수록, 자기 관리가 철저하지. 분명 정말로 때려쳤을거야.....자신을 지나치게 맹신하는게 그런 이들의 단점이지만..."




최강희는 TBM을 매일매일 접속했다. 혹시, 만에 하나라도 여왕, 혹은 닥터 솔을 만날수 있을까 하는 마음에.


그러다가 수요일 오후에. 까페에 홀연히 등장한 닥터 솔을 볼수 있었다. 그녀는 바로 1:1을 청했고, 상대는 한동안 무응답이다가, 이윽고 1:1을 받아들였다.


티렉스와 닥터 솔은 여러 대화를 했다. 첫인사에서 닥터는 상당히 놀란 눈치였다. 경계식에서 벗어난게 놀라웠을 것이다. 강희는 그저, 친구의 도움을 얻었다고만 짤막하게 말했다. 길게 말할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대화로 그녀는 닥터에게부터, 수많은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


강희가 그렇게 떠나간 후에, 여왕은 한동안 움직일 줄을 몰랐다고 한다.


닥터 솔은, 자신은 내심 진설영을 사랑하고 있었다고 강희에게 회고했다.


그는, 거의 실어증에 걸리다시피 된 그녀를 자신이 책임져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그랬고, 여왕을 잘 독려해서, 그녀의 매혹안에 여지껏 놀아났던 사람들을 최면에서 풀리게끔, 권고하고 설득해 결국 그 일을 해냈다고 한다.


개개인의 지령은 내릴수 없어도, 전체지령은 가능했기에, 설영이 마음만 먹으면 모든 이들에게 건 매혹안 해제는 쉬운 일이었다.


진정안이 한유정의 최면을 풀리게 한 것과, 여왕이 매혹안 해제를 해서 사람들이 풀려난 것에서 차이점이 있다면, 기억을 하냐 못하냐의 차이였다.


거의 자폐에 걸리다시피 된 여왕은, 닥터의 권고만을 들었고, 말 그대로 최면을 해제만 했다.


사람들은, 여왕에게 최면이 걸려 있는 동안,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기억을 못하게 되었던 것이다. 가연과 선민은 강희와 만났던 사실 자체를 잃는 셈이다.


하지만 유정은 달랐다. 진정안이 직접, 여왕이 그녀에게 건 최면을 깨뜨려줌으로서, 기억도 고스란히 유지하고, 최면도 풀린, 훨씬 좋은 상태의 케이스라고 할수 있었다.


어쨌건, 여왕은 자신이 여지껏 부려 왔던 사람들을 모두 해방시켰다고 그랬고, 곧바로, xx정신병원에 입원해서 심리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였다.


보호자는, 물론 닥터 솔이었다. 그녀가 휠체어 신세를 지면서 자폐, 실어 증상을 보인다는 것을 닥터에게서 들은 강희는 마음 한구석이 아려옴을 느꼈다.


강희는, 설영이 입원한 곳을 물었고, 닥터는 그건 왜 묻냐고 되물었지만, 그녀는 계속, 아무튼 가르쳐달라고만 해댔다.


닥터는, 강희에게, 설영이 있는 병원을 가르쳐주었다. 그리고...일주일째가 되던 날....












욕망, 아름다움 등의 꽃말을 상징하는 붉은 장미. 우아한, 여왕에게나 어울릴법한 그 화사한 장미꽃다발을 오른손에 들고, 두 남녀가 xx병원을 찾았다. 사복 차림이었지만, 학생인 것을 단박에 알수 있었다.


붉디붉은, 아름다움의 절정을 머금은 듯한 장미송이들인데도, 그걸 든 여학생의 미모가 더 빛났다.


나이팅게일 동상이 자리해있고, 초록 빛깔의 인조 잔디가 펼쳐져 있는 병원 시설 내에, 휠체어에 몸을 안착하고, 하염없이 멍한 시선으로, 정면만을 응시하는 여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 환자복을 입은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코트를 벗어준 중년의 남성이 있었다.


그는 말없이 여자가 앉은 휠체어를 끌어주다가, 여자의 의사를 물으려는 듯 그녀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춥소....이만 들어갑시다....."


여자는 대답이 없었다. 남자도 대답을 들으려고 한 것은 아닌듯이, 다시 휠체어를 잡은 손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그때...



"...?"


남자는 처음엔 자신의 시야에 들어온, 어느새 다가온 남자애와 여자애를 보더니, 눈을 크게 떴다.


"....아가씨는.....!!"


여자애는 그의 말에는 아랑곳 않는 듯이, 사뿐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리곤, 휠체어에 앉은 여자를 시선에 담았다. 휠체어에 앉은 여자도, 순간 움찔 하고 몸을 떨더니 고개를 들어서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학생을 바라보았다.


"..............."


"..............."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그러다가, 여자 아이가 또 움직였다.


사르륵


그녀는 손에 들린 장미 꽃다발을, 휠체어에 앉은 여자의 무릎 위에 올렸다.


그리고 나서는, 왼손을 바닥에 짚고 오른 무릎을 꿇으면서, 휠체어의 여자 앞에 부복했다.


"........!!"


휠체어에 앉은 여자는 멍한 시선으로 여자애를 보다가, 흠칫 거렸다. 그러다가 그녀는 왼손을 뻗으려 했다.


쓰윽


자신의 뺨쪽으로 여자의 손길이 뻗치는걸 물끄러미 보던 여자애는 오른손을 뻗어 그런 그 여자의 손목을 잡더니 비스듬히 아래로 기울여 여자의 손등이 자신에게 보이게 하였다. 그리고는.....그 손등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아...아아...."


휠체어의 여자는 신음하면서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때, 부복하고 있던 여자아이가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에게 허리를 90도로 숙이고 나선, 말했다.



"......여왕님........."



"............."



"....감사를....그리고...."



"............."



"...안녕히......."



여자애는 그렇게 말을 마친 후에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나서는, 휠체어를 밀던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마찬가지로 다시 한번 직각으로 고개를 숙였다.



쓰윽



"................"


남자는 말없이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그의 눈동자는 붉어져 있었다.



여자애는 그렇게 인사를 마친 후에, 몸을 돌린 후 남학생에게 말했다.



"됐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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