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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을 가르는 칼날처럼-연속살인마의 여자 - 4부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23:02 470회 0건
문혜주는 미술학도였다. 서울에서 조금 떨어진 이곳으로 이사를
결심한 것은 오직, 창밖 경치가 좋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림과 조도형...이 둘이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고 했다.

벽에는 그녀의 그림인 듯한 유화가 제법 품격을 갖추고 걸려
있었다. 강재협은 경험상, 수많은 집을 들락거리며 가택수색을
해 대었다. 소위 범죄에 관련된 인간들치고, 못사는 인간 없다고...
강재협이 이제껏 드나들었던 집들은 그래도 한 재산 한다는
집들 뿐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곳은, 바로
‘이 구희 사건’의 현장이었다.

‘이 구희 사건’. 이 구희는 어느 기업의 사장을 하다가 국회의원이
된 사람이었다. 재산이 많았다. 그런 그가 재산공개니 뭐니 하는
사정에 몰려 재산을 해외로 빼돌리고 있다는 정보를 잡았다.

당시 소위 ‘변태과’로 이동하기 전이었던 터라, 강재협은 수사
1과에서 근무하다가 이 사건을 끼어들게 되었다. 평소 친분이
있던 검사 하나가 이 사건을 맡게 되면서, 강재협이 그 특별팀에
소속이 된 것이다.

검사는 강재협한테서 가끔 소주도 한잔씩 얻어먹고 하던
허물없는 사이였던 터라, 강재협을 팀에 넣어 소위 ‘공’을
세우게 해주려고 배속을 시킨 것이었으나, 강재협은 이런
경제사범 사건을 가장 싫어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친하다
해도 말단 형사와 사건담당 검사의 벽은 높은 것이었다.
군소리 하나 못하고 끌려가 사건 팀에 합류하였다.

서류라고 해 봤자, 온통 숫자로 가득한 장부들 뿐... 초등학교 때
반에서 제일 늦게 구구단을 외웠을 정도로 숫자를 싫어하던
강재협이다. 어차피 이런 수사는 좁고 돗수 높은 안경을 낀
회계사들이 다 파헤칠 것이었다. 그러다가 모든 단서가 갖추어지면,
그 때 우루루 몰려가 체포나 해오면 그만이었다. 골치 아픈
사건이긴 해도, 현장수사를 맡는 형사들에게는 따분하기까지
할 정도로 심심한 일이었다.

강재협은 대충 서류를 보는 척 하다가, 여경이 커피 타주면
그거나 마시고 하며 시간을 때우다가 말 그대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그런 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장본인인
이 구희가 이미 해외로 도주를 했던 판이라... 검사가 친분으로
공이나 세우게 해주려고 불렀다는 의도가, 무안할 정도로 뻔한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한가롭다고나 할까 쉽지를 않았다.
돗수 높은 안경을 끼고 머리가 짧아, 사뭇 조직의 암살자 같은
인상을 풍기는 한 회계사가 이 구희의 수입구조에 이상한
숫자들을 발견해냈던 것이다. 그게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또 어디서 뒷돈이나 받아 챙겼으려니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도 큰 숫자들이었다. 고작 이제 처음
국회의원이 된 이 구희였다. 그것도 양로원이나 시장바닥들을
잘 구슬려서 따낸 뱃지로 소속도 없는 무소속의원이었다.

이렇게 많은 돈을 먹여가며 뭔가를 청탁하기에는 그의 배경이
너무 작았고, 돈은 너무 많았다. 게다가 정기적이라 할 정도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당선된 곳은 경상도의 한 촌이었다.
그 정도 돈이면 아마 그 지방의 일년예산쯤 될 것이다.

검사가 어느 날 밤, 강재협을 포장마차로 불러내서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검사는 이 구희가 국회의원이 된 것은, 다른
목적보다도, 오직 뱃지 그 자체에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뱃지 그 자체가 갖는 능력이랄까, 권한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여기에 대한 답변을 도출해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 이 구희는 국회의원이 된 이후로,
외국에 자주 나가고 있었고, 또 지금도 외국에 나가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그가 무엇을 운반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아마 그 대답이, 그의 숨겨둔 계좌에서 쏟아져 나오는 거액의
정기입금과 관련이 있을 것이었다.

이야기가 여기에 이르자, 강재협은 온몸의 신경이 바짝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그의 오랜 형사생활의 경험이 깨어나는
신호였다. 사건 냄새였다. 그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날도 강재협은 수사본부의 구석에서 자판기 커피를 뽑아 들고
담배 한 대를 맛있게 뿜고 있었다. 갑자기 핸드폰이 짖어대기
시작해서 검사실로 달려가보니, 검사가 팩스 한 장을 내 밀었다.
팩스를 받아보고 강재협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구희가 LA의 한 싸구려 모텔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군.”

신문 기사였다. 한 중년의 동양인이 한 모텔에서 타살체로
발견되었고, 그 모텔 주변에 몰려든 경찰차들이 북적대는 사진이
찍혀 있었다. 사건사진 옆에 여권사진인 듯한 이 구희의 사진이
둥글게 실려 있었다. 그래도 한 나라의 국회의원이라는 작자가
남의 나라에서 그것도 싸구려 모텔에서 타살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그가 머물렀던 방안의 가방에서 마약이
운반된 듯한 흔적이 있었던 것이다. 미국 경찰들은 이 사건이
미국의 마약조직과의 거래 중, 뭔가가 틀어져 살해당한 것으로
보고 있었다.

이 구희의 시신이 서울에 도착했을 때, 부검에 참여했던
강재협은 그가 정확히 가슴과 머리에 총을 각각 두 발씩 맞고
사망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시체 위로 냉철한...
그러면서도 조금의 주저도 없이 정확하게 총을 다루는
무표정의 사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강재협은 이 구희의 집을 가택수색하였다. 이 구희는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마약운반의 피의자로서 취급되었다.
결국 그의 별장에서 팔다 남은 얼마쯤의 마약 잔여분과
숨겨져 있던 여덟 개의 계좌, 그리고 현금, 다이아몬드 등이
발견되고, 사건은 종결되었다.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한심한 사건이었다. 한국에서는 그의
살해범을 찾고자 하는 요청을 미국 수사당국에 내지 않았다.
파헤치면 아마 더욱 커다란 망신덩어리가 줄줄이 나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던 것이리라. 구좌들이 그의 이름으로
되어 있지 않았고, 또한 가족들은 그런 구좌의 존재여부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구희의 그 많은
계좌들에 들어있던 불명금들은 모두 국고에 환수되었다.
국회의원이라는 뱃지를 준 나라에 대해서 그가 보답한
유일한 일이었다. 그 보답으로 나라는 그의 명예를 철저히
지켜 주었고, 덕분에 그의 아내에 세 딸들은 전혀 아무 것도
모른 채 무사히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강재협이 갑자기 이 ‘이 구희 사건’을 떠올린 것은, 문혜주의
아파트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강재협은
일찍이 이것과 비슷한 그림을 이 구희의 집에서 보았다.
특징 있는 그림체가 낯이 익었던 것이다. 이 구희의 집에 있었던
것은 문혜주의 그림이 틀림없었다.

다만 달랐던 것은 그의 집에는 그림을 마치 꽁꽁 억누르려는
듯한 두텁고도 화려한 액자로 장식되어 있던 반면에,
문혜주의 집에서는 그저 아무 액자도 없이 덩그러니 캔바스만
걸려 있었던 것 뿐...

‘왜 문혜주의 그림을 이구희가 갖고 있었던 것일까?’

문혜주와 이구희는 서로 알고 있던 사이였을까? 어쩌면 화랑에
내어놓은 문혜주의 그림을 그저 이구희가 지나가다 마음에 들어
샀을 뿐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마약을 거래하기 위해서 국회의원 뱃지씩이나 욕심을
내었던 사내가, 과연 화랑 같은 데를 들락거리며 그림을 샀을까?
그런 취미가 있는 사내로는 절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결론은 한가지, 문혜주는 이구희를 안다. 그리고 이구희는
문혜주를 통해 문혜주의 연인이었던 조도형을 알고 있는
것이다.

조도형은 이구희로부터 마약을 받아 판매하였다. 하지만
물건의 성격상, 어지간한 보증이 없으면 함부로 내보일 수
없는 물건이다 보니, 조도형은 어쩌면 문혜주를 보증서 대신
이구희에게 내세웠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문혜주는 조도형의
말에 따라, 이구희에게 하루밤 봉사를 했을지도 모른다.

어디까지나 억측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한 순간,
강재협의 눈가에 또다시 조도형이 체포되던 순간, 문혜주의
그 눈부신 몸 위에 겹쳐져 있던 조도형의 몸과, 그리고 문혜주의
벌려진 두 다리 사이에 마구 박히고 있었던 그의 시커멓게
번들거리는 자지가 떠올랐다.

강재협은 그녀의 새하얀 허벅지가 떠오르자 마치 떨쳐버리기라도
할 듯,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거칠게 휘젓고는 창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커튼 사이로 달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창문을 열려 하자,
순간 적막으로 가득했던 공간에 찢어질 듯한 쇳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라 손을 멈춘 강재협은 그것이 알미늄 샷시가 긁히는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한동안 손 댄 사람이 없으니, 창 틀에
먼지라도 끼어 빡빡해졌었던 게다. 하지만 소리에 이미 질려버린
강재협은 창문을 열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다시 방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처음엔 그저 깜깜하기만 했던 방이, 새어들어온 달빛도 있어,
제법 물건들이 눈에 보였다. 벽에 걸려 있던 그림이 보였다.
시계도 시간이 멈춘 채 그대로 걸려 있었다. 그저 건전지가
끊어졌을 뿐일까? 저 시계가 멈추는 순간에, 시계는 무엇을
보았을까?

어쩌면 조도형이 몰래 숨어들어와 문혜주의 자취를 찾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문혜주가 혼자 돌아와 조도형을
기다리며 눈물을 닦는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문혜주와 조도형이 이 방에서 만나 재회를
소리 죽여 기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강재협은 갑자기 마음이 바빠졌다. 자신이 왜 이 방에 왔는지
그 목적을 생각해 낸 것이다.

강재협은 품 속에서 수첩을 꺼냈다. 그리고는 어떤 페이지를
찾아 꼼꼼히 방의 모습과 대조해가기 시작했다. 수첩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지난번에 왔을 때의 방의 모습이 빼곡이 적혀
있었다. 그림도 있었다. 그는 지금 그것과 달라진 곳이 없는지를
꼼꼼히 되짚어보며 찾고 있는 것이었다.

엎어진 장롱, 뒤집혀 내장이 다 드러난 설합장. 벽에서 떨어져
나와 있는 책상, 엎어진 이젤, 흐트러져 밟혀 터진 물감들...

강재협은 곧 싫증이 났다. 벌써 열 번이 넘도록 이곳을 찾아와
달라진 곳을 찾고 있지만, 아무 데도 달라진 곳은 없었다.
아마 모든 물건을 모두 되돌려 놓고, 이것들을 흐트러진 상태로
다시 돌려놓아보라고 해도 아마 강재협은 수첩없이 그대로
흐트러뜨려 놓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런 그였다. 거실을
한번 돌아보아도 뭔가 달라진 모습을 바로 알 수 있을 터였다.
마치 다른 그림 찾기 게임을 하는 듯 하였다. 강재협은 거실을
대충 보고 부엌쪽으로 갔다. 순간 강재협은 흠칫 숨을 멈추었다.

‘뭔가가 달라져 있다! ’

그것은 예감이었다. 마치 지진을 느끼는 쥐처럼,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는 달라진 무언가를 알아채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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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입일 2016-08-11
접속일 2024-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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