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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 리와인더 - 1부26장 ← 고화질 다운로드    토렌트로 검색하기
16-08-24 23:30 537회 0건
* 타임 리와인더 (Time Rewinder)
- 이 소설은 소.라.넷(sora.net) 작가 "상상의신비"가 연재 중인 작품입니다.
무단 불펌을 삼가해 주시길 부탁드리며, 퍼가시더라도 출처와 작가명을 꼭 남겨주십시오.
창작가들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이자 도리입니다.


* 1부 26장


유정이는 허리가 참 가늘다. 눈대중으로도 그걸 알 수는 있지만 이렇게 오토바이 위에서 그녀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껴안고 있노라면 그 사실을 더욱 뚜렷이 실감하게 된다. 문득 그녀의 몸매를 머릿 속으로 그리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조금 불손(?)하다는 생각을 스스로 했다.

왜일까? 이유는 몰라도 내 마음 속에서 스스로 유정이의 존재를 필요 이상으로 신비스럽게 미화하고 있는 듯 했다. 비록 그녀의 오토바이를 얻어타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그 설레는 느낌에 익숙해지는 것은 아무래도 어려운 일이었다. 서로의 몸이 닿은 채로 맞게 되는 그 바람결의 느낌이 여전히 너무도 싱그러웠다.

그리고 속도감...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 속도감은 너무도 모순적이었다. 현실 감각을 잊게 할 만큼 짜릿한 그 속도감 앞에서 역설적이게도 왜 그 어느 때 보다도 마음은 더욱 뚜렷해지는지. 문득 그녀의 오토바이가 내게 있어서도 뭔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뭐래도 이 좁디 좁은 안장 위에서 그녀에 대한 나의 마음을 인식했지 않은가.

"다 왔어요. 여기 맞죠?"
"으응."

집까지 오는 길이 그리도 짧게 느껴질 줄이야. 한번 와봤기로소니 유정이는 야속할 만큼 똑똑하게 길을 잘 찾아서 한번에 내 자취방 앞까지 나를 데려다 놓았다. 일부러 좀 길을 헤메도 좋았을 것을 이리 정확하게 데려다주니 오히려 기분이 좀 쓰다. 하지만 그녀가 나와 같은 마음일리는 없을 테니 미워할 수도 없었다.

"그럼 들어가요. 근데 정말 병원 안 가도 괜찮은거 맞아요?"
"다, 당연하지. 근데 유정아..."
"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녀를 이대로 보내기 싫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렇다고 그 순간 머릿 속에 떠오른 첫 대사가 고작해야 "라면 먹고 갈래?" 따위였으니 내가 아직도 찌질이 티를 벗지 못했음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으리라.

"아, 아니야. 태워다 줘서 고마워."
"그래요. 몸 관리 잘하고 견학갈 때 봐요."

그녀는 아쉬움도 없이 엑셀을 당겨 사라진다. 요란한 엔진 소리만이 쓸쓸하게 남아서 입맛을 더 쓰게 만든다. 나는 왜 이렇게 병신같은 걸까? 누군가가 내게 욕이라도 시원하게 한마디 해주면 좋겠다.

"병신."

하늘이 내 뜻을 이루어 주는구나. 내 입에서 나온 욕설은 아니니까 분명 누군가가 던진 욕이겠지? 하하, 누가 때마침 내 마음을 이리도 잘 알고 시의적절한 욕을.... 이 아니고. 씨발, 어떤 놈이야?

"당신...."

놈이 아니라 년이었다. 여전히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에, 매캐한 냄새를 뿜는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고, 생동감 없는 모습으로 원룸텔 입구에서 나를 덤덤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요새 왜 이렇게 자주 보이는 거에요? 원래는 얼굴 한번 보기도 힘들었던 것 같던데."
"멍청한 놈."

302호 그녀가 당황하는 내 면전에 대고 다짜고짜 욕을 한다. 이상하게 화가 나야 하는데 그녀의 퉁명스런 욕설 앞에 뭔가 찔끔하듯 움츠러드는 나였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생각조차도 들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그래요? 내가 뭐 잘못했어요?"
"정말 처음이 어려워. 그래서 짜증나지. 아무리 주변 환경이 너를 돕고 있다 하더라도 네 스스로 뭔가 하지 않으면 얻어낼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인데."
"그건 또 무슨 말이에요?"

그녀는 여전히 목적 없는 선문답 같은 말을 한다. 담배 연기만큼이나 모호한 대화였다. 하지만 그녀는 내 스스로 그 의미를 찾지 못함을 한심하게 여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그런 나의 무지를 자연스럽게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를 경멸하는 듯한 그 시선 앞에 그만 기분이 묘해졌다. 그렇게 당연하게 업신여김을 받게 되니 오히려 기분이 나쁜 줄도 모르겠달까.

"내가 너에게 그 시계를 다시 쥐어준 의미를 한번 생각해보는게 좋겠어. 그런 식으로 골동품 취급 하라고 준 건 아니었거든. 그렇게 멍청하게 굴 거면 그냥 내가 도로 가져가는게 나을 지도 몰라."
"자, 잠깐만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거에요, 갑자기?"
"잘 들어."

여자는 꽤 길게 남은 장초를 투박하게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넣었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아마 그런 말이 있었을 거야. 매번 널 지켜볼 때마다 내가 그런 심정으로 여기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 과정이 정말 구질구질해. 차마 눈 뜨고 못 보겠다는 얘기야. 무슨 말인지 알아들어?"
"아, 아니요."
"내가 너에게 이 말을 하는 것도 이제 몇 번째인지 모르겠어. 하지만 매번 변함없이 너는 너무도 한결같이 멍청해. 그 멍청함을 미워할 수 없는 나도 어찌 보면 웃긴 년이지."

연기 때문에 목구멍이 텁텁한지 그녀는 말하다 말고 인상을 썼다. 그렇지 않아도 메마른 인상의 그녀가 그렇게 얼굴을 찡그리자 예쁘고 못생겼고를 떠나서 너무도 마이너스적인 감정이 뚜렷하게 전달되는 것 같아 절로 태도가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근래들어 그녀와 비교적 자주 마주치면서 제법 그녀와의 대화에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나는 용기를 내어 또 질문을 던져본다.

"당신은 시간을 거슬러 돌아와 나를 만난건가요? 그것도 몇 번씩이나?"

물론 타임 리와인더를 갖기 이전의 나라면 이런 생각 따윈 할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시계의 능력을 직접 경험해 본 내 입장에서 그녀가 던지는 말의 몇몇 단면들을 가지고 판단하자면 여기에 결론이 머물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나를 알고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녀를 만난 적이 없었다. 그녀가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고 믿는 그 비현실적인 가정이, 지금 내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생각이었다.

"당신은 누구에요? 말해줄 수 없나요?"

여전히 그녀는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질문에 당황한 기색을 보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녀는 그 질문을 회피했고, 나는 그것이 대답을 거부하는 것임을 느낄 수 있었다. 대신 그녀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다시는 그딴 식으로 사용하지 않는게 좋을 거야."
"네? 뭘요?"
"시계 말이야."

상의 안주머니에 든 초시계의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은 나와 그녀, 두 사람 뿐....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렇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가 내가 시계를 쓰는 매 순간마다 그것을 감시하고 있을 거란 추측은 과연 정상일까?

너무 비약적이다. 그러나 그것이 비약이라면 지금 그녀가 내게 던지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누가 보더라도 지금 그녀는 어젯밤에 내가 현아를 상대로 타임 리와인더를 활용한 방식을 지적해오고 있는 것이었다.

"시계를 다시 손에 넣자마자 처음으로 한다는 일이 고작해야 "오래 섹스하기"라니.... 알고는 있지만 넌 볼 때마다 정말 단순한 놈이구나. 하지만 그런 식으로 굴려먹다간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야. 명심해."
"수명 때문인가요?"
"수명...? 그것도 이유가 될 순 있겠지."
"예전부터 궁금했어요. 시계를 사용할 때마다 수명이 줄어든다는건 어떤 식으로 비례하는 거죠? 하루를 되돌리면 내 수명은 얼마나 줄어드는 건가요?"
"비밀이야. 그걸 가르쳐주면 재미없잖아."

그녀는 꼭 뭔가 말해주는 것 같으면서도 내가 핵심적으로 알고 싶어하는 부분은 말해주지 않는다. 그에 대해 따지고 들 수 없음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있는 나 자신도 웃긴 노릇이었다. 도통 알 수 없는 것 투성이지만 그 와중에도 이 시계의 놀라운 능력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은 그 심리가 스스로 생각해도 정말 놀라웠다.

"네가 알아서는 안 되는 것들이 있어. 그걸 알게 되면 네 앞날이 바뀔 테니까. 넌 정해진 대로 가야만 하거든."
"내 앞날이 정해져 있다는 얘기인가요? 운명론처럼 들리는 얘기인데요."
"운명?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런 낭만적이고 거창한 것은 아니야. 당연히 겪게 될 일의 순서라고 해야 할까.... 내가 너에게 요구한 "선택"처럼."
"그 선택 말인데요.... 좀 생각해봤는데, 당신이 얘기하는 그 선택의 순간이 꼭 찾아온다고 어떻게 확신하는거죠?"
"무슨 뜻이지?"
"난 당신이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고 확신해요. 훗날의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일거라 생각하지만요.... 그렇다고 해서 나의 앞날을 당신이 내다볼 수 있다는 뜻은 아니잖아요. 시간을 거슬러 온다고 해서 미래가 항상 같아지는 것은 아닐 텐데."

이미 "시간을 되돌린다"는 말도 안 되는 일이 현실로 일어난 이상, 설사 그녀가 내 미래를 내다보는 일종의 예지력 또는 초능력을 지니고 있다 해도 말이 안 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녀 앞에서 비상식을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태여 내가 이렇게 물은 이유는 그녀를 떠보기 위함이었다.

그녀가 미래에서 온 사람, 그것도 나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하나의 가정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 나는 이 사실을 전제로 두고 그녀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하지만 떠본다는 표현이 무색하리만치 그녀는 너무도 당연하게 내 질문을 받았다. 어찌보면 내 의도가 성공한 셈이지만 그녀의 반응으로 보건대 애초에 그 사실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몰랐다.

"그렇군. 지금 너는 나비효과 이론 같은걸 떠올리고 있구나. 내가 과거로 돌아온 시점에서부터 이루어지는 작은 것들 하나하나가 결국엔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란 얘기겠지. 안 그래?"

그녀는 나의 가정을 인정함과 동시에 내가 어설프게 추측하고 있었던 내용을 본인의 입을 통해 술술 문장으로 뱉었다. 나는 도리어 할 말이 없어져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래. 틀린 말은 아니지. 네 말대로 나에게 미래를 보는 능력 같은게 있는 것도 아니니까."
"그럼 당신이 말한 그 순간이 어떻게 내게 찾아온다고 확신하는 건가요?"
"왜냐하면 여태껏 쭉 그래왔으니까. 네가 이해할 순 없겠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것들도 있는 법이거든. 또 그렇게 하기 위해서 내가 여기 있는 거고."

모호하다. 그녀와의 대화는 정말이지 모호하다는 말 이외엔 표현이 불가능했다. 나 또한 나름대로 머리를 굴려가며 그녀와의 대화에서 뭔가를 얻어보려고 했지만 마치 꼬인 실타래를 억지로 풀어내려는 것 같은 막막한 기분이었다. 게다가 무어라고 말을 꺼내기 전에 그녀가 먼저 내 말을 잘랐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어. 말했듯이 네가 그 시계를 어떻게 활용하건 나는 관여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내 충고는 새겨 듣는게 좋을걸. 너를 위해 하는 말이니까."
"하지만 나는 당신이 내게 이걸 준 이유조차도 잘 모르겠다구요."
"그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선택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잖아. 네가 좀 더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나는 도울 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만능인 것도 아니지. 네 스스로 의지를 갖지 않으면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걸 꼭 명심하라구."

돌이켜보면 그녀와 나누었던 것치고는 정말 길었던 대화였다. 등을 돌리는 그녀의 모습에서 더이상 말을 섞고 싶지 않다는 의사가 뚜렷하게 느껴졌기에 붙잡을 수도 없었다. 다만 그녀는 계단을 오르기 전에 몇마디를 더 남겼다.

"방금 그 아가씨 말이야."
"네?"
"그 오토바이 타는 아가씨."
"그 애가 왜요?"
"소중하지?"
"네?"

뜬금 없는 질문이었다.

"갑자기 왜 물어요 그런걸?"
"대답이나 해. 소중해, 안 소중해?"

좋아해, 안 좋아해? 도 아니고 소중하냐고 묻다니 정말 이상한 질문이었다. 의도를 모르겠는건 둘째치고 하필 그런 단어를 선택하다니. 무슨 대답을 듣고 싶어서 이러는 걸까.

"소중해요. 근데 그건 왜요?"
"그럼 찌질하게 굴지 마."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계단을 올라가는 몇 차례의 발소리만이 그 자리에 남아 울렸다. 적막한 바람 한 줄기를 맞으며 나는 잠시 거기에 그대로 서있었다.

그리고 마치 운명처럼,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모습의 오토바이 한 대가 골목에서부터 달려와 내가 서 있던 자리에 와서 멈추었다. 지극히 혼란스러웠던 와중에도 그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의 얼굴을 보자 대번에 반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 유정아."
"오빠, 왜 안 들어가고 있었어요?"

불과 좀 전에 헤어졌긴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달라진게 있다면 그녀가 아까는 없었던 무언가를 손에 들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난 바람 좀 쐬느라.... 그, 근데 너는 왜?"
"이거 죽이에요. 배탈이라고 하길래.... 집에 두고 저녁까지 먹어요."

한 꾸러미의 종이백을 받아보니 전자레인지 용기에 포장 된 죽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받아드는 내 손이 이상하게 조금 떨렸다. 감동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그보다는 가슴을 울리는 설렘이 더 컸다. 그녀의 얼굴은 비록 담담했지만 그 순간 그녀가 그렇게 예뻐보일 수가 없었다.

"고, 고마워. 생각도 못 했는데...."
"별 것 아니에요. 그럼 진짜로 갈게요."

문득 그녀가 다시 엑셀을 당기려는데 그 때 신기하게도 옆집 여자와 나눴던 말이 떠오르고 말았다. 이렇게 그녀가 가고 나면 못내 아쉬워 했을 거라는걸 알았기 때문일까? 어쩌면 타임 리와인더의 힘에 조금은 의존했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저것 생각하기도 전에 내 입에서 대뜸 이런 말이 나오고 있었다.

"같이 먹고 갈래?"
"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잠깐 있다 가지 않을래? 그냥 보내기는 좀 미안해서."
"미안할 것 없는데..."
"그래도 네가 그냥 가면 아쉬울 것 같아."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내 모습에서 문득 언젠가 현주에게 고백했던 날의 내 모습이 겹쳐 지나갔다. 그래, 돌이켜보면 이 시계가 내게 그토록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건 바로 이런 것 때문이었다. 타임 리와인더가 돌아왔다는 실감이 신기하게도 어제보다 지금 이 순간 더욱 뚜렷하게 느껴졌다.

"그래요, 그럼."

다행히 시간을 되돌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


"여기가 오빠 방이에요?"
"으응. 좀 지저분하지?"

생각을 바꾸는게 좋으려나.... 아무래도 시간을 좀 돌아가서 청소라도 하는게 좋지 않을까. 다행히 바닥 청소는 며칠 전에 해서 꼬슬한 털들이 널부러져 있는 꼴만은 면했지만 이불도 제대로 개지 않았기에 방 안이 심히 너저분했다. 유정이가 혹시나 실망하지는 않을까 싶어 여차하면 시간을 되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 사는 집 같아서 나름 괜찮은데요."

문득 그녀가 부모님 없이 혼자 살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떠올리자 나는 괜히 조금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유정이는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여기 방세 어때요? 괜찮은 편이에요?"
"어? 그냥 대학가 앞 평균 시세 정도지 뭐. 그건 왜?"
"방세 보고 이 근처로 이사올까 싶은데, 오빠 생각은 어때요?"
"어어?"

뜬금 없는 그녀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이사를 하는거야 그녀의 자유지만 굳이 내 자취방 근처로 이사를 오겠다는 그 한 마디 만으로 이미 혼자만의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나였다. 유정이가 이웃이 된다면.... 물론 나로서는 나쁠게 전혀 없는 일이긴 하지만 왠지 그 소식에 대놓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좀 그랬다.

"여, 여기 나름 살기 좋긴 하지. 편의시설도 근처에 많고.... 학교랑도 적당히 가깝고."
"그래요? 잘 됐네요."
"그런데 갑자기 이사는 왜? 원래 살던 집은 어떡하고?"
"아버지랑 같이 살던 집이라 혼자 살기엔 너무 넓어서요. 아버지가 계실 땐 도장으로도 운영했었지만 지금은 사람도 없으니까, 뭐.... 학교랑 멀어서 다니는데 불편하기만 하구요."

들뜨는 얼굴을 보이고 싶지 않은 마음에 괜히 등을 돌리고 마실 것을 준비하는 척 했다.

"예전부터 학교 근처에 방을 하나 구할까 생각은 했었어요."
"그렇구나... 뭐 니가 이사오면 나야 좋지. 친한 이웃 하나 더 생기는 건데. 심심하지도 않고."
"사실 오빠가 자취한다는거 알았을 때 좀 섭섭하던데요. 진작 말해줬으면 이것저것 물어봤을텐데."

만약 다른 여자가 이런 말을 한다면 그 이상의 어떤 의미가 있었을 거라 생각했겠지만 유정이가 이런 말을 한다는건 문자 그대로 정말 섭섭했단 얘기였다. 그래서 못내 미안해졌다.

"미, 미안."
"괜찮아요. 그나저나 빨리 드세요. 오늘 밥 못 먹었을거 아니에요."

유정이는 내가 대접한 루이보스 찻잔을 두 손으로 쥐고 다람쥐처럼 홀짝거렸다. 그런 자신의 모습이 더없이 여성스러운 소녀처럼 보인다는걸 그녀 스스로도 알까 싶었다.

죽을 한술 뜨려고 했지만 방금 담아왔기 때문인지 너무 뜨거워서 제대로 입에 댈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숟가락을 잠시 내려놓고 식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뜨거운 죽이 왠지 지금 내 기분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쓸 데 없는 감정이입은 괜히 유정이를 대하는 나의 태도만 더욱 뻣뻣하게 만들겠지만.

"오빠."

유정이 입에서 나오는 오빠 소리는 뭔가 들을 때마다 가슴 한 쪽을 간질거리게 만드는 기분이었다. 그런 그녀와 어색한 분위기로 있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먼저 말을 꺼내주는 것이 내심 고마웠다.

"응."
"정말 괜찮아요?"
"응. 죽 먹고 쉬면 나을 거야. 별로 심한 배탈도 아닌데."
"아니, 배탈 얘기가 아니라요. 서연 언니 말이에요."
"서연이?"
"그 한수라는 선배가 언니한테 고백하게 놔둬도 괜찮아요? 오빠는 정말 그래요?"

유정이가 그 문제에 신경을 계속 쓰고 있다는 것이 내게는 꽤 복잡미묘한 기분으로 다가왔다. 물론 나의 연애사에 유정이가 신경을 쓴다는 것은 내게 관심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도 되지만, 만약 그녀가 정말로 내게 호감이 있다면 내가 서연이와 이 이상 잘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아야 정상이 아닐까?

"뭐 서연이가 알아서 하겠지."
"오빠가 그런 말을 하는걸 서연 언니가 들었다면 많이 서운해 했을 거에요. 언니는 오빠를 많이 좋아하는 것 같던데 오빠는 왜 그걸 몰라요?"

맹랑한 그녀의 질문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만다. 그녀의 말투는 "이런 나도 아는 문제를 왜 오빠가 모르냐" 하는 식의 꾸짖음에 가까웠다. 그래서 기분이 더욱 복잡해졌다. 한편으로는 유정이가 야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게 잘 아는 애가 왜 내 마음은 모르냔 말이다.

"할 수 없잖아. 난 여자친구도 따로 있는데."

그녀가 내 마음을 몰라주는 것에 대한 야속함 때문인지 괜히 하고 싶지 않은 얘기를 불쑥 꺼내고 만다. 정녕 내 찌질한 본성은 바뀌지도 않는 건지. 애매하게 굳어지는 유정이의 표정을 보며 뒤늦게 후회를 한다.

더욱이 한심하게 느껴지는 점은 그 말을 하고 난 직후 타임 리와인더를 떠올렸다는 것이었다. 이런 찌질함에 대한 면죄부가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 하다니.... 싫어도 302호 여자의 말이 머릿 속에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찌질하게 굴지 마."

"그래도 서연 언니는 오빠를 많이 좋아하는걸요."
"글쎄. 그게 사실이라고 해도 당장 서연이랑 사귈 수도 없는 일이잖아."
"우리 당주님.... 아니, 외할아버님께서도 어머니를 낳아주신 할머님 외에 여러 정실과 첩들을 두셨어요. 오빠랑 서연 언니가 서로 마음만 맞다면 그런 관계가 되어도 나쁠 건 없지 않나요?"
"뭐, 뭐라구? 지금 나더러 서연이를 첩으로 생각하라는 거야?"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정이의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오니 경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마음에 없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가 태어나고 자랐던 배경에서 받아들인 남녀 관계에 대한 관념이 내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복잡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는 오빠가 없을 때도 오빠 이야기를 많이 해요. 난 여자 마음을 제대로 모르긴 하지만 그래도.... 오빠 얘기를 하는 서연 언니 모습은 즐거워 보였어요. 난 그게 여자로서의 행복이라고 생각해요. 서연 언니가 상처 받지 않고 그 행복을 누렸으면 좋겠는걸요."
"그럼 너는?"
"네?"

유정이의 말 어디에서도 그녀 자신을 위한 "여자로서의 행복" 은 없었다. 그 사실에 나는 속이 상했다. 마치 유정이는 본인 스스로 이미 여자로서의 행복을 누릴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사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걸 알고 있었고, 또 그녀를 여자로 만들어 줄 수 있는 남자가 나이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녀의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았다.

솔직하게 이야기하겠다고 다짐하고 말을 꺼낸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기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본심이 입 밖으로 나와버리고 말았다. 기왕 말이 나온 것, 나는 과감해지기로 했다. 타임 리와인더에 의존하는 것이라 해도 상관 없었다. 그녀의 솔직한 마음을 알 수만 있다면.

"그래. 나도 서연이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줄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주고 싶어. 하지만 내가 네 앞에서 서연이 얘기를 하는걸 꺼리는 이유를 너도 알고 있잖아."
"......."
"난 널 좋아해."

이런 식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싶진 않았다. 유정이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는 순간이 온다면 적어도 이런 것보다는 좀 더 떳떳하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비로소 깨달았다. 그 어떤 방식을 통해서라도 표현을 하는 것이 적어도 안 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을. 뭔가 마음 속에서 막혀 있었던 것이 그 한 마디를 내뱉는 순간 뚫려버린 느낌이었다.

"......."
"미안해. 나도 너한테 이렇게 말하는게 떳떳할 수 없다는거 알아. 하지만 넌 나에게 특별해."
"여자로서 특별하단 거에요?"
"그래."
"서연 언니보다 더요?"
"그래."

서연이에겐 미안했지만 그 또한 내 솔직한 본심이었다. 여기까지 말한 이상 도로 주울 수도 없었다. 아니, 주울 수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너는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오빠는 사귀는 사람이 있잖아요."
"네가 그런건 중요한게 아니라고 얘기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사실 나는 잘 모르겠어요."
"서연이한테는 괜찮지만 너한텐 괜찮지 않다는 거구나."
"그, 그런건 아니에요."

그녀답지 않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니 더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런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건 아닌데....

"난 그냥....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어요. 그것 뿐이에요."

병실에서 유정이와 함께 보냈던 그 밤이 생각났다. 그 때 이후로 그녀도 나름대로 나에 대한 생각을 해왔던 걸까. 그거야 유정이 본인만이 알 수 있는 거겠지만 그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나도 솔직해져야만 했다. 현아가 내게 남긴 교훈이 하나 있다면 바로 그 솔직함만이 열쇠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키스할래?"
"네에?"

내가 말해놓고도 무슨 미친 소리인가 싶었다. 왜 그 순간에 하필 그녀의 첫키스를 가진 남자가 바로 나라는 사실이 그렇게나 선명하게 날 자극했는진 몰라도, 그것이 내가 가진 최대의 무기라는 생각이 들었나보다. 테이블이 덜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죽그릇과 수저들이 요란하게 유리 위에서 춤추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훔치고 있었다. 마치 그 때와 같이....

"으음...!"

당황하면서도 입술을 뿌리치지 않는 유정이의 모습을 보니 계곡에서의 그 날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보다는 조금 더 부드럽게, 조금 더 로맨틱하게 키스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게 되질 않았다. 애초에 무턱대고 이렇게 키스를 하는 것 자체가 부드럽지 않은데 뭘 어떻게 한단 말인가. 저절로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하아...."

남자라는 동물은 왜 키스할 때 손이 가만 있질 못하는 걸까. 나도 모르게 유정이의 등을 쓸어내리던 손이 더욱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과 입술 틈새를 유정이의 숨결이 넘나들자 내가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그 특유의 본능적인 욕구가 넘실거리듯 차올랐다.

"오, 오빠...."

남자보다 더 강인한 유정이였지만 지금은 목소리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실감한다.

그녀는 여자다. 여자가 되고 싶어하는 "그 무엇"이 아닌, 이미 한 명의 여성이다. 오직 그녀만이 스스로 그것을 모르고 있을 뿐.... 이제 상관없다. 내가 그걸 가르쳐주면 된다.

"가만 있어봐."
"흐읍..."

당황하는 유정이의 혀를 내 혀로 얽어 잡아당기면서 손이 부드럽게 그녀의 등과 옆구리를 넘나들었다. 불과 어젯 밤에 현아와 끝도 없는 미친섹스를 하고 난 후였기에 생각보다는 성욕이 불같지 솟진 않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머리 속에 이성이 더욱 선명히 존재할 수 있었기에 내 욕구를 채우려는 손짓보다는 유정이를 애태우기 위한 손짓이 이어지고 있었다.

등허리를 쓸어내리던 손이 서서히 앞으로 돌아오더니, 그녀의 가슴 언저리에 살짝 가서 닿았다. 문득 그녀와 내 가슴이 서로 닿았던 그 날의 기억이 다시 한번 짜릿하게 떠올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 때와는 또 다른 기분이었다.

"유정이 가슴이 이렇게 컸구나..."

같은 촉각이긴 했지만 가슴과 가슴이 닿았을 때와, 손으로 만질 때의 기분은 전혀 달랐다. 봉오리의 윤곽 끝에 살짝 닿았을 뿐인에도 실로 엄청난 크기가 연상되는 무언가가 옷 안쪽으로 느껴져왔다. 더불어 그녀의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주던 유정이의 섹시한 바이크 슈트가 떠올랐다. 눈으로 볼 때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오, 오빠... 잠깐...."

그 순간 내 움직임이 멎은 이유는 어떠한 양심의 가책이라거나 망설임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 유정이의 작은 손이 내 목을 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왼손 엄지 손가락이 목의 기도를 정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조금만 힘을 주어도 급소를 누를 수 있는 위치였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 미안해요!"

유정이가 자기도 크게 놀랐는지 여태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당황하며 내게 사과를 한다. 목에서 그녀의 손이 떨어져 나가자 섬뜩하게 몸을 옥죄었던 긴장감과 더불어 키스를 하던 순간의 아찔함이 동시에 탁 풀려버렸다.

"미안해요, 오빠... 정말 미안해요."
"아, 아니야. 왜 사과하는 거야?"
"나도 모르게.... 정말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어요."

"나도 모르게 손이 움직였다"는 것은 그녀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해야 할 변명이었다. 손이 저절로 움직이는걸 주체할 수 없다는건 그녀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 굳이 사과를 들어야 할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솔직히 갑작스런 기습 키스를 받았다해서 본능적으로 살수를 가해오는 여자가 이 세상에 그리 많을 것 같지도 않았다.

"미안해. 내가 갑자기 그래서 놀랐지?"
"네, 놀랐어요... 가만보면 오빠는 늘 뜬금 없이 키스하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아요."
"아무한테나 그러는건 아닌데...."
"서연 언니가 그런걸 좋아하나요?"
"그, 그런거 아냐."

어색한 적막이 흐른다. 쓰읍... 이게 아닌가.
아무래도 시간을 되돌려야 하려나.

"오빠."
"으응."
"그거 하면 좋아요?"
"뭘?"
"섹스요."
"......."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그건 왜 물어?"
"방금 나하고 섹스하려고 했던거 아니에요?"

순수하기 때문인지 오히려 유정이는 표현에 필터링이 없다. 예, 아니오로 대답할 수가 없는 질문을 그녀는 던지고 있었다.

"사실 오빠가 서연 언니랑 그걸 하는 모습을 봤을 때부터.... 내내 궁금하긴 했어요. 저건 도대체 무슨 기분일까 하고. 내가 본 서연 언니는 정말로 행복해 보였으니까요. 그리고 내가 본 오빠는.... 이상하게 들릴진 모르지만 여자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는 것 같았어요. 난 그게 너무 신기해 보였죠. 어쩌면 오빠한테 호감을 갖게 된 이유도 서연 언니가 오빠를 좋아했기 때문일지도 몰라요."
"........"
"하지만 요새는 잘 모르겠어요. 내가 오빠에게 이런 마음을 갖는게 서연 언니에 대한 모방인지 아니면 정말로 내 순수한 마음인지.... 난 분명 오빠를 좋은 남자라고 생각하지만 아직은 확신을 가질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지금은 오빠를 허락할 수가 없어요."

내가 정말로 싫었다면 굳이 그런 말을 할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나는 유정이의 말이 마음에 없는 소리가 아니라는걸 느낄 수 있었다. 더불어 이건 타임 리와인더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타임 리와인더가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 주지는 못 하니까....

"그래도 오빠가 날 특별하다고 해준게 싫지는 않았어요."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방금 있었던 일을 없었던 것으로 지워버릴 수도 있었을 터였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도 나만큼 마음이 복잡해 보였다. 어떻게 무어라고 정의 내릴 수 없는 우리 관계를 나는 뚜렷하게 정립하고 싶었지만 내가 알기로 지금 우리의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표현은 없었다. 그래서 답답했다.

- 똑똑똑.
가벼운 세 차례의 노크소리. 이 소리만 없었더라도 내가 그 후에 무슨 말을 더 했을지 모를 일이다.

"누, 누가 왔나봐요."

이 원룸에 살고 난 이래로 노크소리를 들어본 적은 없었다. 배달부들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뭘 주문한 것도 아니니 누군가가 내 방을 두드릴 이유가 없다. 현주라면 아마 벨을 눌렀을 테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현주가 온 건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섬칫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시가스에요. 문 좀 열어주세요."

뭐야? 이 시간에 웬 도시가스? 게다가 여자 목소리인데.

"무슨 일...."

문을 열어젖히다 말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문 밖에 서 있었던 사람은 도시가스 검침 아저씨가 아니었고, 심지어 남자도 아니었으며, 불과 조금 전에 보았었던 옆집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계량기 점검하러 왔거든요. 잠깐 실례해도 되죠?"

아니, 잠깐.... 이게 뭐하는 짓이람?

"저기, 지금 뭐하는...."

하지만 어안이 벙벙해진 나를 무시하며 옆집 여자는 성큼 내 방 안으로 들어와 내부 보일러와 검침기를 살펴보는 척 하며 집안을 제멋대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웬 낯선 여자의 침입 앞에 나도 물론 당황했지만 유정이도 덩달아 민망해졌기에 그녀는 눈치를 잠깐 보더니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빠, 저는 이만 가볼게요."
"어? 유정아...."

그녀를 잡으려고 했지만 그 순간 유정이 모르게 내 옆구리를 가격하는 손길이 있어 깜짝 놀라 돌아보니, 옆집 여자가 무미건조한 눈빛으로 주먹을 거두고 있었다. 결국 도망치듯 그 자리를 뜨는 유정이를 그냥 내버려 둘 수 밖에 없었고, 그녀가 가고 나자 내 방에 이제는 옆집 여자와 나만이 남게 되었다.

"이게 뭐하는 짓이에요?"

어이가 없기도 하고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아 그녀에게 다짜고짜 화를 냈다. 하지만 유정이가 문을 닫고 떠난 것을 확인하자마자 302호 여자가 내게 한 행동은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철썩!
옆으로 홱 돌아가는 나의 얼굴. 맞았다는 느낌을 받기도 전에 얼이 빠졌다. 어이가 없다는 생각조차도 할 수 없을 만큼 극도로 어이가 없는 기분을 그 순간 느꼈다.

"왜 항상 그런 식이야?"
"뭐, 뭘...."
"형편 없는 새끼."

그리고는 그녀는 더 할말이 없는듯 몸을 돌려 내 방에서 나가버렸다. 유정이에 이어 그녀가 떠나버리자 나는 내 방에 혼자 남게 되었지만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 이게 뭐야...?"

갑자기 내 방에 침입한 것이나 내 뺨을 때린 것이나 이해가 안 되긴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더더욱 이해가 안되는 사실이 또 있었다.

"왜 우는 거지?"

분명 옆집 여자의 얼굴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 다음 화에 계속 -


안녕하세요, 독자분들 상상의신비입니다
26장은 너무 늦어졌죠?

지난 주엔 너무 바빠서 정신이 없었네요 ㅠ.ㅠ
게시판과 지난 화 댓글을 통해 짧게 공지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면목 없습니다
원래는 오늘도 조금 더 이른 저녁에 올리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맘 같이 안 되더군요
사과의 의미라고 표현하기엔 조금 이상할 수 있겠으나 27화는 분량을 많이 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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