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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8-24 19:51 539회 0건
필름이 끊겨버렸다. 노래방에서 나온 내가 한국을 잡아끌고 삼겹살 집에서 다시, 소주를 마신 것 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다음엔 어떻게 된 것인지 기억이 없었다. 머리가 아픈 것은 아니었지만 몽롱한 느낌과 함께 입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심한 갈증이 느껴져 눈을 떠보니 내 방이 아니었다.

방 안이 어두워 한 동안 주변을 둘러보다가 조금씩 어둠에 익숙해지면서 한국의 원룸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창문이 열려있었지만 방 안은 너무나 더웠고, 갈증과 함께 온몸으로 열기가 올라왔다. 팬티만 입고 있는 내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되어 너무나 끈적끈적했고, 입안은 프라그가 잔뜩 낀 채로 텁텁해서 미칠 것 같았다.

상체를 일으켜 세우는데 내 옆에서는 한국이 역시, 팬티만 입은 채로 대자로 누워서 코를 골고 있었고, 그 옆 싱크대 앞쪽에는 누군가 쪼그려 앉은 채로 고개를 묻고 있었다. 사랑이었다.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분간할 수는 없었지만 사랑을 보자 너무나 미안해서 몸 둘 바를 몰랐다. 황망한 마음에 나는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서 내 티와 트레이닝복을 찾았다. 밖에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해서 옷을 찾으려니 쉽지 않았는데, 다행스럽게도 바로 내가 베고 있던 베개 밑에 깔려 있었다. 되도록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조심하면서 옷을 입고 있는데, 쪼그리고 자고 있던 사랑이 그만 깨어나고 말았다.


“이, 일어나셨어요?...”

몸을 일으켜 세우는 사랑을 보자 너무나 미안해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불을 끄고 있는 것이 다행스럽게 생각될 정도로 미안했지만 그녀는 피곤한 얼굴에도 전혀 싫은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녀는 내가 걱정스러운지 냉장고에서 냉수를 꺼내 컵에다 따라주기까지 했다.


“천천히 드세요, 태복씨...”

황망한 마음이었지만 타는 듯한 갈증이 먼저라 나는 염치없이 벌컥 벌컥 들이키고는 한 잔을 더 달라고 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은은한 빛으로 들어난 사랑의 얼굴은 많이 피곤해 보였지만 그렇다고 짜증스런 얼굴은 아니었다. 그녀는 살짝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시, 물을 따라주었고, 난 그것마저도 모두 마셔버렸다. 시원한 물이 몸속으로 들어가자 정신을 차릴 수 있었지만 사랑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죄책감은 더욱 커지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형수님...제가 너무 큰 실례를 저질렀네요...”

“아이~ 아니에요...호호...이이가 이런 것도 너무 오랜만이어서...다행이에요...태복씨가 있어서...”


술에 떡이 된 채로 자신의 공간을 침해한 나에게 오히려 고맙다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대궐 같은 집에서 이런 짓을 해도 여자들이 싫어할 텐데 이 좁은 원룸에 찾아와 피곤한 몸을 쉬지도 못하게 했음에도 사랑은 다행이라고 했다. 고기 집에서 일한다고 하더니 사랑의 몸에서는 고기 냄새가 풍겨왔다. 나 때문에 제대로 씻지도 못한 것이 분명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고 싶을 정도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그만 가보겠습니다, 형수님...”

나는 이것저것 생각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미안해서 그렇게 말하고 인사를 한 뒤 문으로 향했다.


“방이 좁아서 너무 불편했죠?...많이 뒤척이시던데...”

“아, 아닙니다...괜찮습니다, 형수님...”

신발을 신으며 나는 뒤따라오는 사랑에게 그렇게 말했다. 이 와중에도 한국은 코를 골면서 팬티 속으로 손을 넣어 북북 긁어대고 있었다. 사랑에게 미안한 마음에 나는 서둘러서 나가려고 문을 열려는데, 좀 채로 열리지가 않았다. 구조는 내 원룸하고 비슷했는데 웬 일인지 문을 열수가 없었다. 요즘 들어서 내가 왜 이렇게 고문관 짓을 하는 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잠금장치 이것저것을 만졌지만 문은 열리지 않고 있었다. 사랑은 나를 보고 피식 웃으면서 다가와 잠금장치를 돌리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문이 열렸고, 나는 머쓱함과 미안함을 동시에 느끼면서 얼굴이 더욱 붉어지고 말았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태복씨는 의외로 빈틈이 많은 것 같아요...호호...!...”

“그, 그런가요?...하하...!...”

사랑의 말에 내가 머리를 긁적이면 대답했다. 나도 모르던 나의 또 다른 모습이 다른 사람들을 통해서 점점 들어나고 있었다. 어떤 것이 진짜로 나인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한국도 그랬고, 상인도 그랬고, 경숙도 그랬다. 좀 더 가까워지게 되니 의외의 모습들을 볼 수 있었다. 내가 이런 의외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들과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형수님...조금 만 참으세요. 형이 금방 자리를 잡을 겁니다...”

쓸데없는 말을 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머리가 어지러워서 평상시처럼 내 입을 통제하기가 어려운 것 같았다.


“그래요, 고마워요 태복씨. 오늘은 이렇게 보내서 미안해요. 다음엔 꼭 해장국을 끓여드릴 테니 꼭 드시고 가야 해요, 알았죠?”

사랑은 차분한 인상과 큰 덩치만큼이나 배려심이 많은 것 같았다. 확실히 한국은 여자를 잘 만났다. 방송에서는 한국의 여자들 모두가 된장녀인 듯 그려대지만 현실에서는 이렇게 사랑 같은 여자들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사랑에게 몇 번이고 인사를 하고는 도망치듯 그곳을 나왔다. 주머니엔 핸드폰도 없었고 오직, 지갑뿐이었다. 기억이 가물가물 했지만 어제 집에서 나올 때 핸드폰을 갖고 오지 않은 것 같았다. 핸드폰이 없으니 시간을 확인할 수 가 없어서 답답했지만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아직 어두운 길을 걸어서 도로 쪽으로 나왔지만 개미새끼 한 마리보이지 않았다.

걸어가기엔 너무 멀었고, 택시는커녕 사람조차 보이지 않아서 너무나 적막했다. 아무래도 가장 애매한 시간인 새벽 4시쯤 인 것 같았다. 고민하던 내 시야에 건너편에 있는 공중전화 박스가 들어왔다. 그것을 보자 나는 며칠 전에 여자운전기사에게 명함을 받은 것이 떠올라 지갑을 뒤져보니 아직도 그것이 있었다.

전화박스로 달려가며 주머니를 뒤져보니 다행스럽게도 동전이 있었다. 술에 취해 발버둥을 쳤을 텐데 어떻게 동전이 그대로 트레이닝 주머니에 있었는지 너무나 신기했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었다. 박스 안으로 들어간 나는 동전을 넣은 뒤 명함에 찍힌 번호를 눌렀다. 몇 번 시간이 가기도 전에 여자 운전기사가 전화를 받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녀는 올 수 있다고 했다. 전화박스...동전...여기사...우연처럼 한 치에 오차도 없이 착착 들어맞는 모든 것이 행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를 끊은 나는 밖으로 나와 길바닥에 앉아 숨을 고르며 택시를 기다렸다. 어느 순간부터는 공중전화박스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었는데 상황이 다급해지자 비로소 아직까지 공중전화박스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요하면 필요한 만큼 존재의 가치는 올라간다. 사람도 그럴 것이었다. 그래서 내 또래 친구들은 자신의 가치를 올리기 위해 스펙 쌓기에만 전념하고 있었다. 자기 존재 자체를 부정한 채로 새 옷을 장만하듯이 쌓고 또 쌓는다.

하지만 그런다고 가치가 올라갈까? 한계가 분명한 상황에서 쌓기만 하는 스펙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더 나은 스펙을 갖은 사람들에 의해 또 다시 부정당할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으로 태어나 존재하고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다면 사람이란 존재의 가치는 길가에 우두커니 서서 누군가 자신을 찾아주기를 기다리는 공중전화박스와 같은 것일 뿐이었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니 머리도 어지럽고, 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도대체 술을 얼마나 먹었기에 이렇게 몸을 가누기가 어려운 것일까? 지금까지 살면서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마셔 본적은 없었는데, 본의 아니게 한국과는 그렇게 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놀라운 것은 가물가물한 기억을 더듬어 볼 때, 한국이 그런 것이 아니라 내가 더 마시자고 떼를 썼다는 것이었다.



“아이고!~ 어제 심하게 달리신 모양이네요, 하하하!~~ 괜찮으세요? 어디, 해장국 집으로라도 모셔드릴까요, 손님?”

“아, 아닙니다...그냥 집으로 가겠습니다. %%동으로 가주세요...”

여자운전기사는 환한 얼굴로 나를 보다가 차를 몰고 달려가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오늘도 옷을 거꾸로 입고 계시네요?...”

거짓말처럼 난 또 티를 거꾸로 입고 있었다. 아무래도 서둘러서 옷을 입다보니 그런 것 같았다. 정말 희한한 일이었다. 이 아줌마와 내가 무슨 운명이기에 만날 때마다 이렇게 옷을 거꾸로 입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이것이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요즘 유행하는 옷차림입니다...”

“어머나? 정말이었군요...와!~ 참, 젊은 사람들은 신기해요! 호호호!~”

나의 거짓말에 여기사는 정말이라고 믿고 말았다. 머리도 어지럽고, 뱃속도 허했지만 갑자기 웃음이 밀려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이런 시간에도 일을 하시나요? ...”

“아니요. 새벽엔 일을 하지 않아요. 무섭거든요, 호호...!... 오늘은 어쩌다보니 장거리 손님이 계셔서 이렇게 된 거에요.”

“흐음...제가 운이 좋았군요...”

여기사는 약간 피곤한 얼굴에도 기분 좋게 웃으면서 익숙하게 차를 몰고 내 원룸 쪽으로 달려갔다. 나는 요금보다 만원을 더 주려했지만 그녀가 또 거절을 했고, 어쩔 수 없이 나는 그때처럼 창문으로 돈을 주고 줄행랑을 쳐버렸다. 사실, 지금 내 심정으론 만원도 모자란 액수였다. 그녀는 문을 열고 나와서 나를 불렀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나는 달려서 원룸으로 들어가 버렸다.


원룸으로 들어온 나는 옷을 모두 벗고 욕실로 들어갔다. 무엇보다 시급한 것은 이를 닦는 일이었다. 입안이 너무 텁텁해서 미칠 것 같았다. 요란하게 이를 닦고 샤워기에 물을 틀었다. 끈적거리던 몸에 따듯한 물이 떨어져 내리자 기분이 나아졌고, 텁텁한 입을 헹구자 한결 개운해졌다. 하지만 사랑에게 미안한 마음은 좀처럼 가시지가 않았다.

노래방에서 한국은 활기를 찾는 것 같았지만 그 좁은 원룸에서 깨어나게 되면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지독스런 벽들에 또 다시 막막할 것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도와 줄 수 있는 일도 없었다. 미술학원에서 한국이 할 일은 경비나 운전기사 밖에는 없었다. 더군다나 박기사처럼 봉고차를 갖고 있지도 않았다.

어른들은 대학에만 가면 모든 것이 다 해결된다고 말했지만, 소위 말하는 일류대에 갈 학생들은 소수에 불과했다. 그리고 그 소수의 학생들은 현재 이 사회의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는 자들에게 빌붙어서, 그들과 이익을 나눌 것이었다. 그런 파워게임에서 떨어져 나간 자들은 나처럼 독점 세력들이 던져준 부스러기를 차지하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갈 것이었고, 한국 같은 자들과 그 보다 더 못한 계층의 사람들은 패배자라는 딱지를 평생 안고 자식들에게까지 대물림 한 채로 세상을 저주하면서 살아갈 것이었다.

운이 좋게도 난 좋은 양부모를 만나서 좋은 교육을 받고, 돈 걱정 없이 지내면서 좋은 대학을 나왔다. 하지만 나와 정반대로 똥구멍이 찢어져라 가난한 집구석에서 태어나 어렵게 지방대학을 졸업한 한국과 내가 다른 것이 뭔지 그 차이를 알 수가 없었다. 사람의 인생이 운에 달려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인가?

빌게이츠의 말대로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많은 것을 가진 나는 한국보다 행복해야 하는데 왜 그렇지 못한 것인가? 적게 가진 한국이나, 많이 가진 나나 인생의 파도에 휩쓸려서 표류하는 삶을 살아가긴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벽들 앞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한국과 사랑은 얼마나 견뎌낼 수 있을까?

밥벌이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일이어야 했고, 그래서 처절할 수밖엔 없었다.

샤워를 하고 나온 나는 나른한 몸을 침대에 뉘였다. 침대에 누운 채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또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니가 그렇게 잘났냐!]

꿈은 언제나 비현실적이었고, 엉뚱했다. 내 주변의 여자들과 광란의 섹스를 하는 꿈을 꾸더니 오늘은 뜬금없이 정 원장이 꿈속에 등장해서 험악한 얼굴로 내게 외쳐대 너무나 황당했다. 나는 정 원장에게 무슨 일인가에 대해 물어보려 했지만 내 의지대로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오직 그가 내게 하는 말만을 들어야 했다. 내 몸은 자유로웠지만 입술조차, 손가락조차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난 비로소 꿈이라는 것을 느끼고 정 원장이 하는 말을 계속 듣기만 했다.


[어린 노무 새끼가...!... 니가 살면 얼마나 살았다고 그렇게 잘난 척이야!]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이해할 수 없이 내게 따지고 드는 정 원장의 말을 더 이상 듣고만 있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떻게 꿈에서 깨어나야 하는 지 알 수가 없었다. 꿈을 지속하고 싶을 때는 저절로 깨어나더니, 꿈에서 깨어나려 하니까 그게 뜻대로 되지가 않았다. 정 원장은 계속 내게 뭐라고 욕을 해댔고, 난 꿈에서 깨어날 생각만 하다가 어떤 행동을 했더니 드디어 꿈에서 깨어나고 말았다.

눈을 뜨고 숨을 몰아쉬면서 혼란스런 머리를 정리하다가 또 다시 심한 갈증이 밀려와서 난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들고 벌컥 벌컥 마셔버렸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게도 내가 꿈에서 깨어나게 된 어떠한 행동은 거짓말처럼 기억에 없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2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머리는 무거웠고, 뱃속은 쓰리진 않았지만 무척이나 허했다. 그러면서 갑자기 대변이 밖으로 밀려 나오려고 해서 엉덩이 근육을 조였다. 하지만 엉덩이 근육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후다닥 알몸을 이끌고 화장실로 뛰어 들어가 변기에 앉자마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대변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오는 양을 봐서는 보통이 아니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이 먹었기에 이렇게 밀려 나오는 것인가?

똥을 싸면서 이렇게 땀을 뻘뻘 흘려보긴 처음이었지만, 몽롱한 느낌 속에서도 진한 배설의 쾌감이 밀려왔다. 겨우 겨우 대변을 다 보고 물을 내리니 똥 덩어리들이 빙글빙글 돌다가 밑으로 사라져 버렸다. 빠져나간 것만큼 뱃속은 허했지만 불편한 느낌은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샤워기 물을 틀고 대충 샤워를 했다. 그리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거울속의 내 얼굴을 보니 많이 부어있었다. 이런 몰골로 밖으로 나간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지금은 그딴 것이 신경 쓰이지 않았다. 남에게 내가 어떻게 보여 지건, 그들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던 이제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핸드폰을 열어보니 누구도 나를 찾은 흔적이 없었다. 상인에게 연락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상인은 내 생각처럼 자신의 일에 더욱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서운한 감정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인영과 수많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되었었다. 상인과도 특별한 관계를 맺으면서 애틋함까지 느꼈었지만 거짓말처럼 되어버렸다. 그동안 일어났던 상인과의 일은 꿈이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금의 나는 꿈에서 깨어난 것인가, 아니면 아직도 꿈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것인가? 뱃속이 허한 만큼 머릿속도 허했다. 뭔가를 채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그런 허한 감정이 나를 복잡하게 만들고 있었다.

어제 입었던 반팔 티와 트레이닝복을 다시 입고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광호가 가게를 옮겨서 하얀 짬뽕을 먹지 못하는 것이 아쉬웠지만 다행스럽게도 원룸 근처엔 꽤 유명한 선짓국 집이 있었다. 걸어가면서 내리쬐는 햇빛에 조금 어찔한 기분이 들었다. 어제 술을 엄청나게 마신 모양인지 머리가 흔들거렸고, 또 다시 갈증이 밀려왔다.


10분 정도를 걸어 선짓국 집, 안으로 들어가니 점심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손님이 거의 없었다. 나는 아줌마의 인사를 받으며 홀 안으로 올라가 창 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메뉴판과 함께 물통을 내려놓는 아줌마에게 선짓국을 시키고 나는 물을 따라 조금씩 마셨다. 그러다가 ‘어서 오세요’라는 아줌마의 소리를 듣고 무심코 입구 쪽을 바라보니 선 그라스를 낀 여자가 안으로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제법 육감적인 몸매의 그녀는 흰색 줄무늬 셔츠에 검은색 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더운 날임에도 흰색 스타킹을 신고 있었다. 도도한 걸음걸이로 내 앞쪽의 테이블에 앉은 그녀는 역시, 아줌마에게 선짓국을 시키고는 선 그라스를 벗었다. 체형도 그렇고 얼굴 윤곽도 그렇고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여자 같았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물을 따라 마시며 나와 시선이 마주친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버렸다. 저 여자...나를 아나? 모르는 여자와 시선을 주고받는 짓 따위는 한 적이 없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여자에게 집중하고 말았다. 어차피 지금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일들을 꿈이라고 생각한 나는 그동안 생각지도 못했던 행동들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계속 그녀를 쳐다봤고, 결국 여자도 내 시선을 받고 말았다. 분명히 그녀는 나를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한 것 같았다. 한동안 그렇게 시선을 주고받던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내 쪽으로 걸어와 앉았다. 우아한 걸음걸이로 내 앞에 앉은 여자는 아줌마에게 이쪽으로 달라고 했다.


[이건...꿈이다...꿈이 분명해...!...]

인영도 그렇고, 상인도 그렇고, 경숙도 그렇고, 모든 것은 꿈이었다. 현실에서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 일이 요 며칠 사이에 벌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또 알지도 못하는 여자가 나의 시선을 받고는 과감하게 내 앞으로 걸어와 앉았다. 이런 일 따위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가 없는 일이었는데 이렇게 쉽게 일어나는 것을 보니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지금은 꿈에서 깨어나고 싶지가 않았다. 이 여자의 몸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마음을 품으면 꿈에서 깼기 때문에 신경이 쓰였지만 모 아니면 도였다.


“흐음...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의외네요...”

여자의 말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원수라니? 나는 짐짓 모른 척 하면서 물을 따라 마시며 창밖을 살폈다. 그런데 옆으로 주차된 차중에 눈에 익은 차가 보였다. 렉서스였다. 차를 보자 그녀가 누군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의외의 모습은 당신이 더한 것 같은데요?”

내 말에 그녀가 쌍꺼풀이 없는 눈으로 내게 물으려다가 아줌마가 선짓국을 들고 와서 우리의 얘기는 일단 중단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선짓국을 받아들고는 약속이나 한 듯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먹었다. 그리고 동시에 시원함을 표현하고는 피식 웃고 말았다.


“선짓국 같은 음식은...안 먹을 것 같은데 의외네요...”

여자는 내 말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제가요? ...제가 선짓국, 안 먹을 것 같이 생겼다고요?”

“이런 음식, 안 좋아하실 것 같습니다.”

내 말에 그녀가 웃으며 보란 듯이 선짓국을 먹기 시작했고, 처음 봤을 때의 그 도도한 몸짓과는 다르게 세상의 모든 풍파를 다 겪은 여자들의 모습을 보여서 신기했다.


“그럼, 제가 뭘 좋아할 것 같은데요?”

“아침은 채소위주의 간단한 식사를 하고...점심엔 까르보나라와 스타벅스 커피 한 잔...그리고 저녁엔 ...”

“저녁엔?...”

“...이를 악물고 쫄쫄 굶을 것 같습니다.”

여자는 내 말을 듣고는 엄청난 소리로 크게 웃었고, 그 소리에 놀란 아줌마들이 우리 쪽을 쳐다봤다. 계천에서 신경전을 펼칠 때의 그 도도한 모습은 이미 없었다. 한국도 그렇고, 상인도 그렇고, 주인여자도 그렇고, 지금 내 앞에서 선짓국을 먹는 이 여자도 겉으로 보고 느꼈던 것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어떤 모습이 진실인지 분간할 수 가 없었다.


“인연인지 악연인지 모르겠지만...서로 통성명이나 하죠. 전 황지선이라고 합니다.”

여자는 뜬금없이 그렇게 말하고는 명함을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사실, 난 명함이 없었고, 서로 그런 것을 주고받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 여자는 이런 행동이 익숙해보였다.

명함을 보니, 디자인회사의 대표이사였다. 지방 소도시에서 디자인회사를 하는데 렉서스를 몰고 다닐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명함 없어요?”

“...그런 것 없습니다. 미술학원 강사가 명함 같은 거 만들어야 쓸데도 없으니까요...저는 장 태복이라고 합니다.”

“어머? 미술학원에서 일해요?...어디요? ...$$$미술학원?”

지선은 정확하게 내가 다니고 있는 정 원장의 학원을 집어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더욱 흥미 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선짓국을 먹었다. 미술학원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 이렇게 까지 흥미로운 일인지는 처음 느꼈다.


“그나저나 명함을 받아 버렸으니 학원 광고 일을 의뢰해야 하는 건가요?”

“그럴 필요 없어요. 전 관공서 일만 하니까요. 사기업은 일의 진행도 까다롭지만 돈을 받아내기가 너무 힘들어서요. 1000만원도 안 되는 돈을 6개월짜리 어음으로 끊어주는 곳도 있어요. 하하하!~”

정 원장과 유정에게 들은 바로, 한국 사회에서 디자인 회사를 하는 것은 거의 미친 짓이었는데 아무래도 그것보다 현실은 더욱 심한 것 같았다. 지선의 얘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현을 한 나는 다시 선짓국을 과장되게 먹었다. 그리고 큼직한 깍두기를 통째로 입에 넣고 깨물었고, 짜증나게 길게나온 김치를 젓가락으로 찢어서 그것을 집어먹었다.


“태복씨는 젓가락질을 정말 잘하시네요. 요즘 친구들은 젓가락질이 너무 형편없던데...”

당연한 것을 물어봐서 뭐라고 대꾸를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우리 또래들은 젓가락질에 대해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다. 젓가락질이 서툰 애들은 포크를 사용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 내 또래에 비해 엄한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젓가락질을 잘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이게 그렇게 신기한 일인가요?...”

“나이가 먹어서 그런지 요즘 젊은 친구들에게서 거슬리는 것이 많아지더라고요...하하...!...”

나 보다 연상인 느낌은 있었지만 그렇게 나이차가 많아 보이진 않았는데 의외였다.


“지구에서 산지 얼마나 됐는데요?”

지선은 내 질문이 유치한지 피식 웃었고, 나처럼 익숙한 젓가락질로 깍두기를 집어 먹었다.


“하하!...그래요. 흐음...그러고 보니 제가 지구에서 산지...40년이나 됐네요...!...태복씨는 요?”

40살이라니 또 놀라고 말았다. 40살이면 70년생인가? 71년생인가? 겉으로 보기에 잘 봐야 80년 생으로 보였는데 도대체 어떻게 관리를 하기에 저런 몸을 하고 있을까? 하긴...몸짱 아줌마는 이 여자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음에도 20대같은 몸을 하고 있었으니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28년 살았습니다.”

“어머나 세상에...28살 밖에 안 됐어요? 제 막내 동생보다 어리네요, 하하하!~”

선짓국을 먹으면서 나와 지선은 서로에 대한 얘기를 주고받았다. 그녀는 이 지역 대학의 디자인과에서 시간강사로 일하면서 동시에 디자인 회사를 하고 있다고 했다. 계천에서 지선과 함께 있던 버릇없는 젊은 놈에게 내가 심하게 했을 때 자신의 감정을 들어내지 않았던 것이 이해가 갔다. 시간강사로 지내는 것도 쉽지 않았겠지만 무엇보다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할 일들의 연속이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제가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나요? 17살 때도 이랬는데...”

“하하하!~ 태복씨는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성숙해 보인다고 해야 맞을 것 같아요. 전 어려보이죠?”

“많이 어려보입니다. 17살 때도 그랬나요?”

지선은 내 말이 무척이나 재밌는지 계속 웃어댔고, 식당 아줌마들이 자꾸 쳐다봤다.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지선은 이 지역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이 지역의 인구가 30만이 조금 넘는 곳이었지만 이곳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나이든 사람들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유치원부터 시작해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심지어 대학까지 20년을 넘게 좁은 지역에서 지냈기 때문에 한 다리만 건너면 바로 어디 사는 누군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지선씨는 이곳 출신이 아니죠?”

“...태복씨도 그런 것 같은데요?”

“...전,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요? ...태복씨는 서울 출신인 줄 알았는데...”


내가 태어난 곳은 광주였고 6살 때까지 살았기 때문에 사투리가 무척이나 심했었다. 사투리 습관을 고치는 것은 한자나 외국어를 습득하는 것 보다 더욱 어려웠다. 시간이 지나고 내가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는 인정을 받았지만 그 놈의 사투리 때문에 나 스스로가 콤플렉스에 시달려야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말투가 다른 것뿐이었는데 나는 내가 틀렸다고 생각했었다.

영특한 아이라도 다른 것과 틀 린 것을 구분하긴 어려운 일이었다. 그로인해 나는 말수가 점점 줄어들었고, 필요한 말 이외엔 하지 않으면서 혼자 있을 때는 미친 듯이 서울말을 배웠다. 볼펜을 입에 물고 아나운서들의 발음을 따라하려고 노력하다보니 사투리는 고쳐졌지만 아이답지 않은 말투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좋게 말하면 어른스러운 아이였고, 나쁘게 말하면 징그럽게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그렇게 난 내가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남들에게 보이고 말았다. 테니스장에서 만난 조숙한 아이인 재혁이 부자연스럽게 느껴진 것은 녀석에게서 나와 비슷한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듯이 남에게 내 모습 그대로 보여 지지 않는 것은 무척이나 불편한 것이었고, 견디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재혁이 내게 테니스장 샤워실의 비밀구멍을 통해 베르디움 여자들의 알몸을 구경시켜준 것은 어떤 신호일 수도 있었다.


“어려서 서울에 올라갔기 때문에 고향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나는 생각보다 꽤 많은 기억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친부의 일을 알게 된 후 의식적으로 광주엔 가지 않았고, 어릴 적 내 흔적을 보고 싶지가 않았다.


“저와 비슷하네요. 저도 고향이 부산인데 3살 땐가 서울로 이사를 가서 기억이 전혀 없어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면서 우린 선짓국을 다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지선이 먼저 주인아줌마게 다가가 계산을 해버렸다. 이럴 때마다 나는 무척이나 불편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과 밥을 먹고, 또 그 사람이 계산을 해버리면 다음에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계산하는 것이 너무나 끔찍했기 때문이었다.


“커피는 제가 사죠...”

“바보 같은 소리 말아요...여기, 이렇게 맛있는 커피가 공짠데, 왜 그런 비싼 커피를 마셔요?”

밖으로 나오는데 식당에서 주는 공짜 커피를 뽑으며 지선이 그렇게 말했다. 너무나 의외였다. 고급 커피 아니면 안 먹을 것 같은 차림을 하고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판기 커피 두 잔을 뽑아들고 하나를 내게 건네주는 지선이 너무나 신기하게 느껴졌다.


“너무 그렇게 놀라워하지 말아요. 내 겉모습은 모두 먹고 살기위해서 그런 것뿐이니까요. 이래봬도 제가 책임져야 하는 인간들이 많거든요.”

이런 여자가 계천에서는 왜 그런 반응을 했을까? 그때는 마치 있는 집 마나님처럼 행세했었는데 지금은 너무나 생소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나저나 ...그 젊은 친구는 괜찮나요?”

“젊은 친구요?...후후...그 친구, 태복씨보다 7살이나 많은데요?”

“후우!~ 요즘은 확실히 겉모습으로 사람을 분간하기가 너무 어렵네요. 앞으로 몇 년이 지나면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하하하! 맞아요. 요즘은 남자들도 화장을 한다던데, 정말로 그렇게 될 것 같아요.”


나보다 일곱 살이나 많으면서도 20살처럼 보인 그 남자가 도대체 지선과 어떤 관계인지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었지만 나는 더 이상 물을 수가 없었다. 이 또한 수놈의 본성일 것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모르는 여자와 만나 너무나도 비현실적으로 이렇게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나자 앞으로 이 여자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어떤 가능성을 느끼게 되니까 그녀 옆에 있는 다른 수놈이 신경이 쓰였던 것이 분명했다.

그런 생각이 들자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나와 버렸고, 모든 상황이 꿈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선은 나를 바라보면서 묘한 표정을 지었는데 그 모습은 주인집 여자의 모습과 비슷했다. 내 생각을 모두 알 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을 한 지선은 미소를 지으며 남은 커피를 마시고는 종이컵을 구겨서 농구선수처럼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구겨진 종이컵은 담벼락을 맞은 뒤 정확하게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나보네요? 하하...좋아요. 저도 태복씨에 대해 궁금한 것이 생겼어요.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태복씨가 제게 하고 싶은 얘기가 생기면, 그때 저도 제 얘기를 해주죠. 오늘 즐거웠어요, 태복씨. 잘 가요!~”


주인여자도 내가 핑계를 댈 수 있을 때 자신도 핑계를 대겠다고 했었는데, 지선도 내가 먼저 뭔가를 준비하길 바라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의 나는 준비가 덜 돼있다는 말인가? 지선은 나를 보고 미소를 보이며 익숙한 솜씨로 렉서스를 몰고 식당을 나가버렸다. 물끄러미 달려가는 차를 보던 나는 그녀 말대로 지선의 대해 많은 것이 궁금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이었다. 이것이 꿈이라면 언젠간 깨어날 것이었고, 꿈이 아니라면 어떻게든 흘러갈 것이었다.


뱃속에 음식이 들어가서 그런지 속이 든든했고, 머리도 조금 맑아졌다. 내 원룸으로 돌아와 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오니, 이상하게 방 안이 지저분하게 느껴졌고 불안정해 보였다. 상인이 정리해준 내 방은 아직도 지저분하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 눈에 거슬렸다. 나는 책장의 책들을 모두 끄집어내서 다시 내 식대로 차근차근 정리를 했고, 책장뿐 아니라 티브이, 컴퓨터, 싱크대, 가스렌지까지 싹싹 닦았다. 그리고 청소기를 돌려 바닥뿐 아니라 침대를 분해해서 그 밑의 먼지까지 싹싹 긁었고, 걸레를 빨아 미친 사람처럼 닦고 또 닦았다.

온 몸은 땀으로 젖었지만 변한 내 방을 보니 비로소 안정감이 느껴지면서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이제 문제는 빨래였다. 옷을 많이 갖고 있지 않은 나는 그동안 빨래를 하지 않고 있어서 더 이상 입을 옷이 없을 정도였고, 빨래바구니엔 옷들이 그득했다. 바구니 속에 쌓여있는 옷들을 보자, 난 헛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항상, 뭔가를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정작, 가장 중요한 것은 뒤로 미루고 있는 나를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지금 해야 할 것을 먼저하고 천천히 생각하자...]

나는 빨래바구니와 가루비누를 들고 2층 세탁실로 내려갔다. 다행스럽게도 평일이어서 그런지 아무도 없었다. 이런 면에서는 내 직업도 그다지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어차피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었다. 나쁘다고 생각하면 나쁜 것이었고, 힘들다고 느끼면 힘든 것이었다. 군대에서도 머리를 비워버리자 기적처럼 몸이 편해졌었다. 지금은 차라리 그때처럼 머리를 비워버리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탁기를 열어 빨래를 넣으려는데 안에 뭔가가 있었다. 꺼내보니 여자팬티였다. 저번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데, 참 정신없는 여자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팬티를 꺼내든 나는 저번처럼 빨래걸이에 걸려다가 그 조그만 것을 모자처럼 머리에 썼다. 기분이 이상했지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완전한 변태였다. 그렇게 과장된 몸짓을 하면서 변태 흉내를 내다가 혼자 키득거리며 깔깔대고 웃었다. 정말 바보가 따로 없었지만 왜 이렇게 재미있는지 몰랐다.


내가 그렇게 두 손을 들어 올리고 변태 흉내를 내다가 무심코 고개를 돌려보니 입구는 문이 열린 채로 보연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그녀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인지를 따질 겨를이 없었다. 당황한 나는 얼굴이 달아올라 두 팔을 내렸고, 머리에 쓴 팬티를 벗기 위해 애를 썼다. 겨우,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있는 팬티를 벗은 나는 얼른 그것을 빨래걸이에 넣고, 내 빨래를 세탁기에 넣기 시작했다.


“여,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이 코치님?...하하하~”

과장되게 웃는 내 모습이 무척이나 한심해 보였을 것이었다. 보연은 약간 당황한 얼굴을 하다가 이내, 피식 웃음을 보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이건 제거에요...흐음~ 제 실수 덕분에 정말, 신기한 걸 봤네요, 하하하!~~”

보연의 웃음에 내 얼굴은 더욱 붉어지고 말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따라 웃을 수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난 멋쩍은 얼굴로 빨래를 세탁기에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루비누를 들고 대충 세탁기 안에 뿌려 넣자, 보연이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세상에!~~ 아니, 무슨 빨래를 그렇게 해요?”

팬티를 머리에 쓰고 변태 짓을 하던 내 모습보다 빨래하는 내 방식이 더욱 놀라운 것 같았다.


“예?...뭐가 잘 못됐나요?...”

“흰색 옷과 색깔 옷을 함께 넣고 빨래를 하면 어떡해요?”

“지금까지 이렇게 해도 ...아무문제 없었는데요?...”

내 말에 보연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길게 한숨을 내 쉬고는 어이없다는 듯이 또 웃어버렸다. 난 도대체 왜 보연이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난 걸레도 이렇게 옷가지들과 함께 넣고 빨았는데, 아무래도 보연이 그것을 봤다면 기절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복씨가 여기 살았구나...하하하...신기하네요...!...전 그저께 이사 왔어요. 204호...”

한국이 살던 방이었다. 들고나는 사람들이 많은 원룸이라 누가 올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없었는데 막상, 아는 사람이 오자 신기한 기분이 들면서 과연 광호와 상인이 살던 방엔 누가 올지 궁금해지기까지 했다. 그나저나 보연에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남편이 있는 여자가 원룸을 얻어서 왔다는 건 무슨 일인가 큰일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다.


“몇 호에요?”

“아, 전 410홉니다.”

“맨 끝 방이네요?...호호!~ 심심하진 않겠네...앞으로 잘 부탁해요, 태복씨?”

보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세탁실을 나갔다. 황당한 상황이라 모르고 있었지만 이제야 그녀가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난 2년 만에야 보연의 맨 팔뚝과 맨 다리를 볼 수 있었던 것이었다.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보연의 피부는 검지 않았고, 오히려 상인보다 더욱 하얗게 보였다. 엉덩이는 운동 선수출신답게 볼록한 것이 너무나 섹시했고, 다리는 미끈하게 쭉~ 빠져있었다. 그리고 잔 근육들이 보여서 건강미와 함께 섹시미를 동시에 느끼게 하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 들었지만 어이없는 상황에 나는 그만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4층 내 방으로 올라갔다. 문을 열고 들어가려다가 무심코 상인이 살던 방의 문을 열어봤지만 잠겨있었다. 방이 나가기 전까지는 보통 문을 잠그지 않았는데 잠겨있는 것을 보니 상인의 방도 나간모양이었다.


내 주변으로 엄청난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곳에서 3년 가까이 지낸 시간보다 요 며칠 동안 일어난 일들이 더욱 많게 느껴졌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될 것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지만 묘한 기대감과 함께 흥분이 들었다. 이제는 상인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그녀와의 관계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주인여자에게도 핑계를 댈 수 있을 것 같았고, 학원에서 경숙을 만나더라도 불편할 것 같지가 않았고, 지선을 만나서는 내 얘기를 과장되게 하면서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의 나라면 엄마를 만나도 당당해 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나는 냉수를 마셔서 흥분을 가라앉혔다. 지금의 내 모습을 엄마가 본다면 어떻게 반응할지 생각만 해도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기분 좋은 흥분감에 젖은 나는 점프를 해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무심코 창 밖을 보니 주인집 창문이 열려있었다.


[주인아줌마가 집에 있나?]

그렇게 한 참을 주인여자가 나타나길 바랐지만 그녀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나의 바람대로 이뤄지지는 않았지만 이렇게 어긋나는 것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느껴져서 크게 낙담을 하지는 않았다. 분명, 지금의 모든 상황은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자기, 나야...!”

침대에 누운 채로 나는 상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처럼 보고 싶다거나 만나고 싶다는 욕구에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전화를 한 것이었다. 이런 내 자신이 너무나 신기할 정도로 지금의 난 여유가 있었고 너무나 차분했다.


[어찌나 바쁜지 눈알이 빠져 버릴 것 같아...!...]

“하하하! 요즘, 모두들 장사가 안 되서 죽겠다고 난린데, 행복한 소리한다...!...그래도 돈이 좋은 가봐? ...나는 보고 싶지도 않지?”

[무슨 소리야!...자기 보고 싶어서 죽겠는 걸 지금 꾸욱~ 참고 있고만...!...]

“그래, 그래...가게가 안정되면 그때 만나자!...알았지?...사랑해!~~”

[나도 사랑해, 자기야!~~~]


나도 나지만 상인도 보통여자는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따지면 광호가 더 대단한 것이었다. 자기 아내가 이렇게 다른 남자와 지내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남자가 그럴 수 있을 까 싶을 정도로 광호는 개의치 않아했다. 아무리 자신 때문에 힘든 삶을 살았다고 해도 광호처럼 아내의 새로운 남자를 인정할 수 있을까?

도저히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저 이정도 선에서 상인과의 거리를 조정하는 것이 광호에 대한 예의이고, 상인과 나를 위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본능적인 느낌으로도 분명 지나치게 되면 탈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태복아!~ 여기까지다, 여기까지...!...”

막상, 상인과의 관계를 나름대로 명확하게 규정짓고 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러면서 내가 이렇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이 경숙처럼 내 주변 여자들과의 어떤 관계를 염두에 둔 수놈 근성 때문이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경숙처럼 여자들과 그런 사이가 되고, 종석처럼 여자에게 좆 물리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나는 그런 기대감을 안고 살고 싶었다.

우연이었든 필연이었든 여자들이 나를 변화 시켰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몰랐지만 분명한 것은 여자는 나에겐 꿈이자 미래였다. 상인과 경숙과의 관계를 통해 난 비로소 한 발작을 내 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한 시간이 지난 뒤 다시 세탁실로 내려가 빨래를 바구니에 담아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빨래걸이를 편 나는 천천히 빨래를 걸었고, 모두 다 걸고 나자 가루비누 냄새가 온 방안에 퍼졌다. 가뜩이나 좁은 방이었기 때문에 냄새는 금방 퍼졌고, 방은 더욱 좁게 느껴졌다.


“기분이 좋아 보이네요?”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주인여자가 창문으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고, 나도 주인여자를 보자 기분이 좋아졌다. 주인여자와의 섹스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주인여자를 보니 너무나 편하고 기분이 좋았다.


“예!~ 방 청소도 했고, 빨래도 다 했거든요. 하하하!”

“또, 빨래와 걸레를 함께 빨진 않았겠죠?”

“예?...”

주인여자는 생각한 것 이상으로 나에 대해서 많이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모든 것이 궁금한 것투성이였다. 난 지금 이 상황에서 그냥 넘어가기가 싫었다. 이미 핑계를 댈 준비도 되어있었기 때문에 전처럼 어영부영 지나치기 싫었고, 주인여자의 핑계를 듣고 싶었다. 기분 좋은 흥분을 느끼면서 나는 침대 위를 올라가 성큼 성큼 걸어서 창 문 앞까지 다가간 뒤 그 위로 올라갔다. 그러자 주인여자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무슨 짓이에요?...위험해요...!...”

주변을 살피며 주인여자가 조심스럽게 외쳤고, 나는 당황한 그녀가 너무나 귀엽게 느껴졌다. 이 시간에 원 룸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아니, 보연처럼 집에 있다고 해도 이런 것에 신경 쓰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이었다. 원래 원룸이란 곳은 누군가 살인을 저질러도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완벽한 개인공간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요... 사는 게 이렇게 벼랑 앞에 서있거나, 지구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아서요...!...견디기 힘들어서 뛰어내리고 싶지만 바닥은 항상, 아찔하기만 하고 말이죠. 바닥까지 내려가야 올라간다던데 불가능하지 않을까요?”

뭔 소리를 하는 것인지 나 자신도 모른 채 되는대로 주절거렸다. 내 말을 듣던 주인여자는 더 이상 말리지 않고 내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태복씨라면 가능할 것 같아요...주인공이 쉽게 죽는 일은 없으니까요...”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주인공? 내가 주인공?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말인가? 생각한 것보다는 상투적인 말이었고, 식상한 표현이어서 실망했다. 주인여자라면 꽤나 근사한 말을 할 줄 알았는데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곳으로 가고 싶어요...이젠 핑계를 댈 수 있어요...!...”

“... ...”

“주인공이잖아요, 전...!...”


내 말에 주인여자는 뭔가를 생각하다가 이내 창문에서 뒤로 물러섰다. 내 방은 4층으로 꽤나 높았다. 주인집과는 1미터가 채 안될 정도로 좁은 거리였지만 그렇다고 쉬운 거리는 아니었다. 군대에서 훈련을 할 때도 항상, 이 정도 높이는 가장 공포감을 느끼게 했기 때문에 표현을 하지 않았지만 미칠 것 같은 공포감에 시달렸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밑을 보지 않았고, 오직 주인집 창문만을 보고 있었다.

밑을 본다는 것은 실패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절대로 밑을 보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군대에서도 하지 못했던 동작으로 점프를 했고, 정글을 누비던 모글리처럼 멋지게 주인집 안으로 넘어갔다. 사실, 거리는 문제가 아니었고, 창문을 통과한 후가 더 문제였다. 주인집 방 안의 상황이 어떤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나의 행동은 무모한 짓이었고, 엄청나게 위험한 행동이었다.

점프를 해서 머리부터 멋지게 창문을 통과한 나는 방바닥으로 떨어질 때 낙법으로 구르며 떨어졌다. 등짝에 상당한 충격이 느껴졌지만 다행스럽게도 바닥엔 두꺼운 이불이 깔려 있어서 다치지는 않았다. 주인여자는 그새 이불을 깐 모양이었다.

떨어지면서 등에 충격을 받았지만 그것보다 한바퀴 구르면서 벽에 부딪친 머리의 충격이 더했다. 머리가 어찔했지만 나는 벌떡 일어서서 크게 웃어버렸다. 마무리가 시원치 못해서 쪽팔렸기 때문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주인여자의 얼굴이 많이 상기되어 있었다. 절박한 순간에도 그렇게 차분함을 유지했던 여자였는데, 지금은 얼굴이 많이 붉어져 있었고 불룩한 가슴의 움직임이 느껴질 정도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결국...들어와 버렸군요...내 안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버렸어요...”

주인여자는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하고는 갑자기 내 품으로 와락 안겨왔다. 갑작스런 그녀의 반응에 나는 당황했지만 본능적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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